[Grinama]
연필을 쓰고 싶다.
뭘 쓰고 싶은지, 뭘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연필이 쓰고 싶었다. 엔틱한 갬성, 어릴 때 연필을 쓰던 사소한 추억 같은 것들이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사용보다는 수집이 될 것 같지만.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세상 간지 나는 전동 연필깎이가 갖고 싶었다. 알아서 전동으로 깎아주고 심지어 다 깎으면 지잉- 자동으로 상승한다. 이렇게 간지 나는 기계라니. 보자마자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마음속 메아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졌지만 나는 한 달을 참았다. 나는 평소에 연필은커녕 샤프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필깎이 따위에 짝사랑을 앓으며 한 달 여간을 고민한 끝에 ‘연필을 쓰면 되지!’라는 단순하고 명쾌한 결론에 이르렀다. 별 고민 없어 보이는 결론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내 나름으로는 꽤나 치열한 고민이었다. 나는 연필로 글씨를 쓰면 악필이 된다. 펜으로 쓰면 그나마 괜찮은데, 연필로 쓰면 늘 글씨가 개발새발 날아가 버린다. 샤프도 비슷하다. 어쩌면 흑심 자체와 별로 궁합이 좋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펜으로 글을 쓰고 컴퓨터로 옮기는 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대학시절부터는 한 문장도 간편하게 수 십 번씩 키보드로 고치며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되어 종이에는 한 번에 완결된 온전한 문장을 쓰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얼마 쓰지도 않는 극소수의 글조차 나는 언제나 키보드로 쓴다.
도무지 연필을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지이잉- 하는 전동 연필깎이의 간지는 이러한 나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연필은 별론데 연필깎이가 갖고 싶어서 연필을 쓰게 되었다- 라는 다소 한심한 이야기다.
나는 연필깎이를 거금 38,000원을 들여 구입한 나의 소비를 정당화하기 위해 칼로 한 땀 한 땀 연필을 깎아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추억 이라든가, 모두가 집에 하나쯤은 갖고 있었을 샤파의 연필깎이 기차와 같은 아련한 기억들을 소환해보려 하지만 딱히 내게는 그런 추억도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산물에 가까운 기계에 현혹된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이고 엔틱한 감성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인 척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38,000원짜리 연필깎이가 제 소명을 펼치지 못하고 무용한 기계가 되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연필을 들어 아주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다.
써보니 개판이긴 하지만 어쩐지 괜찮은 것도 같다. 근데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고 싶은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이런 자기기만과 정체 모를 사명감 때문에 종이 위로 적어 내려가는 맥락 없고 무질서한 글이나마 이전보다는 더 자주 쓰게 된다면 괜찮을 것도 같다.
부디 이 글이 연필 글의 마지막이 아니길 빈다.
이 글에는 38,000원의 가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