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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중지추 Dec 08. 2023

피해의식(4)

조수미와 엄마






유퀴즈에 조수미가 나온 적이 있다. 밝고 화사한 표정과 말투와 달리 그녀가 내뱉는 언어는 조금 달랐고 무거웠다. 서울대 음대 수석 입학이라는 영광과 1년의 진한 연애 그리고 학사 경고와 제적. 연애에 얼마나 빠져있었으면 학사 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을까 싶지만 어떻게 보면 연애에 집중하는 에너지가 곧 삶에 집중하는 에너지가 아닌가 싶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는 맞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던 유학 생활.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공부가 있었다. 말이 공부지 언어가 안된 상태에서 공부란 뼈를 깎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다 어른이 되어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 생각해 보면 다른 언어에서 성과를 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5년의 공부를 3년에 마친 독종 중의 독종이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어머니의 그 사랑과 헌신이 없었다면 자신의 성과도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의 엄마에 대한 기억과 소회였다. 엄마의 꿈이 사실 성악가였다. 그 꿈이 조수미를 통해 투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수미는 어릴 적부터 공부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 있었다고 한다. 성악에 입문하고 나서는 엄마가 거의 매니저 겸 감독, 비평가의 모든 역할을 했다. 노래를 끝내고 무대 뒤로 내려오면 '잘했어' '수고했어'라는 말 대신 엄마의 혹독하고 냉철한 비평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정확한 평가였으니 조수미도 엄마의 말을 반박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재석이 물었다. "자기 님은 엄마에게 어떤 딸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라고 물었다. 조수미는 " 저는 그냥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는 딸, 엄마와 둘이 마주 보며 도란도란 편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딸로 기억되면 좋겠어요."라고 말을 했다. 성악을 잘하는 딸이라느니, 세계의 몇 대 소프라노 가수라는.. 이런 타이틀을 가진 딸이 아니라 엄마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고, 그냥 편하게 가서 기대고 이야기하고 웃고.. 하는 그런 딸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피해의식은 대물림된다. 피해의식은 사실 결핍의 형태로 드러난다. 결핍된 감정은 채워야 한다. 자신의 아버지의 학벌 콤플렉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학원과 학습지에 치여 산 친구가 있다. 아버지는 명석하고 공부를 잘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후에 회사에 들어가서도 승진에서 꺾이거나, 퇴사해서 사업이 잘 안 되는 모든 이유를 자신의 학벌과 연결시켰다. 가고 싶은 대학을 못 갔기에 이 모든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에게만큼은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 어릴 적부터 집 안에서 공부를 시켰다. 사실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요구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모두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요구는 다그침일 수밖에 없다. 공부가 다그침으로 느껴지면 그때부터는 이 아이는 공부에 대해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고, 공부가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로드매니저, 슈케쥴 매니저.. 꿈 부여자 등등 해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이들의 마음과 정서를 품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태어나서 혼자서 자랄 수 없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그 보호라는 건 의식주의 해결뿐만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만나는 부모와의 정서적 소통과 건강한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배움이라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해소하는 곳이 또 가정이기도 하다.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를 편안하게 놔버리고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한데 그곳은 바로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집이 그런 곳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밖으로 돌 수밖에 없다. 정서적 보호자가 부모가 아니라 친구가 되는 경우도 많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고 싶은 것이 무엇 인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부모가 주고 싶은 것을 자식에게 준다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생각도 안 해 본 상태에서, 부모가 알려준 길이 꽃길이기만 한 걸까라는 회의도 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자식이 가장 원하는 건 근원적이고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고 해도 결핍이 안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기억되고 싶은 딸로서의 조수미는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부모의 역할이 참 어렵다. 정한수 떠 넣고 북두칠성을 향해 새벽 기도를 하던 어머니의 정성만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일말의 후회가 없는 아니 후회가 적은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지금은 미래의 과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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