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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중지추 Jun 22. 2023

애도의 시간

4. 결핍이 지탱에 주는 관계에 익숙해진다는 것

‘결핍이 지탱해 주는 관계’ 에 익숙해지다   


  어머니는 국민학교만 졸업했다. ‘머리는 좋았지만’ 집안 멕여 살리느라 어릴 적부터 미싱을 밟았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아는 언니와 같이 방을 쓰며 미싱을 밟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집을 떠나 일을 한다는 게 어떤 고생인지 지금은 훤히 보인다. 비바람을 혼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당시엔 누구나 그랬다고 일반화될 수 있는 고통은 아니다. 다 겪는다고 해서 내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내가 견뎌야 하는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외 할머니를 자주 대하면서도 가끔 ‘나를 공부도 안 시켰다’라고 눈물 썩인 토로를 했다.      

  아는 언니와 세 들어 살던 주인집이 부자였다. 아니면 부자로 보였다든가. 부자로 살라고 내 이름은 그 안주인의 이름을 딴 이름으로 지었다. 부자가 되어서 동생도 공부시키고 집안도 살리라는 말을 주문처럼 나에게 했다.      

  어릴 적 집에는 재봉틀이 있었고 어머니는 미싱을 자주 밟았다. 드르륵 하다 멈추면 어머니는 이로 실을 끊었다. 또 드르륵 하다 멈추면 미싱 기름을 기계에 먹이곤 했다. 미싱 옆에는 손으로 누르면 나오는 미싱에 기계칠 하는 기름도 항상 같이 있었다. 옷도 만들고 집안 인테리어용 보자기도 만들었다. 어느 순간 미싱은 사라졌다.     


어머니가 나에게 항상 하신 말씀이다.      

“넌 딸이니까 집안을 돕고, 학교도 가지 말고, 동생을 돌봐라!”     

 “네”     

“넌 딸이니까 집안을 돕고, 학교도 가지 말고, 동생들을 돌보거지?”     

 “네”     

  그런데 마음속에선 어느새  거부의 마음이 일었다. 나 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생각이, 내 자아가 크고 있었다. 입 밖으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넘어가면 내 인생 아무것도 안 될 거라는 직감이 강했다. 난 다행히도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주위를 둘러보면 부모님께 끝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 특히 어머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고, 어머니의 감정적 남편 역할을 하거나, 끊임없이 효도를 강요당하거나 그런 거 말이다. 효도를 빙자하여 시간과 돈의 희생을 받고서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끊임없이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주위에 50이 넘어서야 가스 라이팅을 당했음을 자각하고 지금에 와서 그 고리를 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름 집안일을 하거나 아니면 어머니 일을 도왔다. 그러나 맘에 안 들어 했다. 일도 할 줄 모르고 집안일도 못 하는 아이라고 자주 욕을 먹었다. 어머니는 버거웠을 것이다. 6명의 자식과 실직한 남편, 시어머니. 세 끼의 식사를 준비하고, 돈을 마련하고, 집안을 건사하고. 빨래만 하더라도 식구가 많으니 김장할 때 쓰는 대야에 빨래가 넘쳤다. 겨울에는 찬물에 빨래를 하느라 손을 호호거리며 빨래를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초등학교 때였다. 두 살 아래 동생과 내가 동시에 미술 시간 준비물이 크레파스였다. 둘 다 아침에 크레파스를 찾으며 분주했다. 책상 서랍을 여니 크레파스 한 통과 꽁다리들이 여기저기 잔뜩 널려 있었다. 동생에게 한 통을 줬다. 동생이 먼저 선수를 쳤다거나, 고집을 피웠거나 그런 건 아니다. 새것 한 통과 꽁다리 중에 누군가 꽁다리를 가져가야 한다면 내가 가져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져가서 꽁다리뿐인 그 시간을 견디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왠지 그런 시간을 견디는 게 힘들다거나 모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단지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의 최선이므로 부끄럽지도 않았다. 동생에게 한 통을 주고, 난 남은 꽁다리를 다 모아서 군데군데 크레파스가 찐득하게 묻어 있는 크레파스 통에 넣었다. 색깔들이 군데군데 비는 정도가 아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고, 제대로 된 길이 보다 겨우 남은 조각으로 색깔을 겨우 채우는 그런 정도였다. 그나마 그 꽁다리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크레파스 떡이 잔뜩 묻어 있어 어떤 한 가지 색깔도 제대로 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선생님은 나의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선생님은 준비성이 없다고, 이딴걸 가지고 그림이냐 제대로 그리겠냐고 핀잔을 주셨다. 억울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그냥 혼났다. 그냥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담임 선생님이 집이 어려운 학생은 학교에 와서 장학금을 신청하라는 거다. 귀가 솔깃했다. 이어서 근데 집이 있는 사람은 안된다고 한다. 작년에도 그런 학생과 학부모가 있었는데 장학금 신청이 안 되었어. 그러니 집이 있는 사람은 신청하러 오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장학금이라는 말에, 집안을 도울 수 있다는 일념으로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 집이 있는 사람은 안되니 아쉽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다음 날 장학금을 신청하려 학교로 갔다. 어머니를 말리며 나도 학교로 따라갔다. 난 어머니를 따라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 앞에 서 있었따. 어머니는 바로 뒤돌아서 나왔다. 네 말이 맞다고 하셨다.      

 중3이 되자 학교에서는 진로 상담을 했다. 당시엔 연합고사라는 게 있어서 학교마다 만점자가 어느 학교에서 나오느냐가 관심사인 시기였다. 또 인문계든 실업계든 떨어진 아이들을 줄이기 위해 야간 자습이 진행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실업계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실업계라도  부모님이 가라면 가겠다는 마음도 전혀 없었던 것 아니다. 어디 가서나 공부는 하면 되니까.      

 실제로 당시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상고로 진학해서 일찍 은행에 들어가는 아이들도 꽤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 나쁜 선택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친구 중 한 명은 부산의 섬유회사가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로 진학했다. 우리는 그 친구의 선택에 모두 박수를 쳤고, 그 친구는 마치 학도의용군으로 가는 양 비장해 했다. 자신이 집을 떠나 돈을 벌어서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가상한 마음에 우리 모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 2 년 뒤에 그 친구는 집으로 돌아왔다. 파리한 얼굴로 아파서 돌아왔다고 했다. 대학 가서야 알았다. 공순이라고 불린다는 걸.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같이 일하고 공부했던 동료들. 시대의 아픔이자 상징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요즘도 ‘빨간 꽃 노란 꽃 꽂밭가득 피어도, 미싱은 잘도 돈다. 돌아간다.’라는 노래가 들리면 그 친구가 떠오른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버스 차장으로 취직한 아이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통학하느라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때 버스에서 종종 만나곤 했다.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쓰고, 사람들이 겨우 다 타서 터질듯한 버스의 맨 마지막에 붙어서 온몸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고 있는 모습. 나를 보며 해사하게 웃어 주기도 했다. 학교는 종점이었기에 버스에 남아서 고등학교 이야기와 버스 안내양 일 이야기를 를 주고받기도 했다.      

 학교에선 어이가 없어 했다. 연합고사 만점을 받아도 시원치 않은데, 아이와 학부모가 실업계 운운하니 기가 차 했다. 선생님들은 진지한게 생각하기보다 그러다 말겠지 하는 분위기였다. 인문계로 결정을 했다.  실업계 가려다 인문계 간 아이로 교무실에서 소문도 났다. 그 덕에 난 자연스럽게 인문계로 진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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