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중지추 Jun 21. 2023

애도의 시간

3. 죽음 이하는 다 시시해


 내가 공부에 마음을 쏟은 건 순전히 동생 덕이었다. 동생의 몫까지 해내겠다는 각오였다. 공부 잘하고 똑똑했으니까 이 정도는 해냈을 거야 하는 마음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는 입학선서를 하고 들어온 아이가 있었다. 얼굴도 이쁘고 목소리도 이쁘고 말도 야무지게 잘했다. 비로 인해 갑자기 교실에서 소풍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아이는 우리를 모아 놓고 혜은이의 제3 한강교를 춤과 함께 멋들어지게 불러 제꼈다. 재주가 많고 눈이 부신 아이였다. 반장과 달리 우리에게 친절했다. 나도 그 아이를 많이 좋아했다. 반장은 선생님들의 온갖 비호와 사랑을 받았다. 아빠가 높으신 분 이래나 뭐래나 그랬다.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자그마한 체구였다. 눈은 컸고 목소리는 단아했다. 어디에서나 통통 튀고 자신감이 넘치고 ‘나는 훌륭하다’로 뭉친 그런 아이였다. 반장과 입학선서를 한 아이는 용호상박처럼 서로 성적을 겨루는 그런 사이였다. 


입학선서를 하고 들어온 반이라 우리 반은 전교에서 1 등반이었다. 우리 반은 좋은 반이다. 들어오시는 샘들마다 1등을 강조했다. 아이들은 의연한 마음으로 1등의 자부심을 가지곤 했다. 물상 시간에 잡담이라며 선생님께서 공부 방법을 말씀해 주셨다. 하루에 2시간씩만 공부하면 전교 1등도 한다고 하셨다. 그대로 했다. 집에 와서 2시간씩 책상에 앉아 있는 건 힘들었지만 그냥 했다. 감히 1등을 꿈꾸진 않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성적이 수직 상승을 했다. 1학년 기말고사에서 반 1등을 했다. 입학선서를 한 아이는 그때 교실에서 울었다. 항상 있었던 성적표의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다면 나라도 이류 인생으로 추락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입학선서를 하고도  계속 1등을 하던 아이와 반장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좋았다. 동생에게 자랑스러웠다. 

 2학년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성적 향상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분이셨다. 방법이 나에게는 먹혔다. 저번 성적 보다 떨어지면 그만큼 매를 맞는다가 원칙이셨다. 뭐라고?  떨어지면 맞는다고? 아이들은 광분했다. 처음 시험을 잘 봤기 때문에 두 번째 시험은 매를 맞았다. 엉덩이를 맞았다. 평균점수가 떨어진 만큼 맞았다. 결심했다. 앞으로 절대 매를 맞지 않겠다고. 그 덕에 성적은  또 수직 상승을 거듭했다. 2학년 마지막 시험에서는 전교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기도 했다. 세상에 다 나쁜 건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동생을 생각했다. 동생에게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미안함도 몰려왔다.  너랑 같이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중학교 3학년 때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담임은 아집과 독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나는 최고다. 나를 따라 복종해라가 그분의 신조셨다. 학부모들에게 촌지를 받는다는 소문이 떠돌던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그분의 눈에 벗어났다. 그때 나는 담임 선생님 과목인 ‘수학 반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간고사 답안지를 붙이라고 지시하셨다. 노느라 그만 깜빡했다.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비난을 해댔다. 그러면서 나를 때렸다. 일명 따발 따귀였다. 한 대를 맞으면 반동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렇게 해서 교실을 한 바퀴를 돌았다. 아이들은 숨도 못 쉬고 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억울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중학교에서도 입시가 있었다. 중3은 방과 후에 전체 자습을 했다. 갑자기 나를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하더니 옥상에서 또 한차례 그렇게 맞았다. 옥상에서 맞았으니 아래층에 있는 모든 교실에 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시간을 맞은 거 같다. 이유는 자신을 무시했다는 거였다. 과학 선생님 제안으로 과학 영재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고 그런 활동을 했다는 거였다. 과학 영재반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따귀는 멈췄다.  이후 당연히 과학 영재반에서 나왔다. 제기랄. 덕분에 이후 이과는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문과로 진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나의 이러저러한 신상을 담임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까지 아는 그런 예의바르고 영악한 아이는 아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어머니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일을 집에 와서 입도 뻥긋 안한 탓도 있을 것이다. 

 졸업이 다가왔다. 나를 서점으로 데려가더니 보고 싶은 책을 고르란다. 한두 권을 고르니 자꾸 더 고르란다. 그 재촉에 계속 고르나 보니 10권이 넘었나 보다.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다음 날 졸업식을 했다.  대학 다니면서 우연히 먼 거리에서 뵌 적이 있는데 건강이 매우 안좋아보였고, 초라해 보였다. 어른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아이 한 명이 크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고 사실 살면서 주위 어른이 따뜻하게 마음을 써 주면 좋은 일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최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슬프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도 매번 동생이 떠올랐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내가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저 난 동생의 죽음에만 몰두해있었기에 죽음 이하는 모두 시시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던것 같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애도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