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걸 데려가야 하는데"
그 일이 있었던 당시 나는 당시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아버지는 실직 상대셨다. 고위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부하 직원의 실책에 대한 책임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셨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다. 의원면직이었다는 것을 다 커서 알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매일 책상에서 글로 한풀이를 하셨고, 그러다 지치면 잠을 오랫동안 주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밥상을 들고 주무시는 방에 들어가면 특유의 찌든내가 났고 그게 싫어서 얼른 놓고 나오곤 했다. 가끔 나를 붙잡아 앉히려고 하는 아버지가 그냥 싫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4남 2녀의 자식들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집 울타리라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자식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거나 하는 일은 기대하지도 못했고 자식들이 밥을 먹는지 옷은 입고 다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다정하게 이름이 불린다거나 밥은 먹었냐 라거나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혹은 이쁜 자식이라는 말이나 표정을 지으며 서로 교감을 느꼈던 시간도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의 늪에서 계속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실직 이후 3~4년간, 이후 집을 짓고 ‘남양체인’를 하기 전까지 정말 어려웠던 것 같다. 그땐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통 몰랐다. 그저 집에서 하나둘 집기들이 사라지는 게 싫었다. 침대가 사라지고, 전축이 사라지고, 빵 기계도 사라졌다. 아마 돈이 조금이라도 되는 건 다 팔았던 것 같다. 즐겨 입던 치마는 온데간데 없어졌고, 옆집에서 쓰던 가방을 깨끗이 닦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반면 부모님의 싸움은 아침저녁으로 많아졌고, 두 분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고, 싸움 중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많은 자식에 대한 걱정스러운 불만이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종종 '지 애비 닮은'이라는 말이라도 들리면 애써 표정도 바꿔보고 행동도 빠릿하게 해보곤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미안함과 나의 존재에 대한 죄책감이 안에서 싹을 틔웠다.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어머니는 동생을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겼다. 수저 하나라도 덜려는 마음, 건사하는 자식을 하나라도 덜려는 마음이었지 싶다. 아마 1년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올 때마다 동생은 오히려 나보다 이쁜 투피스를 입고 오기도 하고, 나는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어린이집도 다니고, 소풍 가서 찍어온 사진을 가져오기도 했다. 얼굴은 달처럼 하얗고 옷은 눈부셨다. 게다가 동생은 어린 나이에도 마음 씀씀이가 이뻐서 집에 오면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를 하기도 해서 어머니의 모든 칭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이 투영된 행동이 아니었다 싶었지만, 그 나이에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말괄량이였다. 그저 친구들과 동네 한구석에서 고무줄놀이며 땅따먹기, 오징어 게임을 하며 해지도록 노는 그런 아이였다.
동생이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 뒤 아프기 시작했다. 동생 친척들 손에 들려 그렇게 나간 그 날부터 어머니의 울음이 시작되었고, 나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울음의 크기로 보아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동생으로 인해 나는 한 번도 대 놓고 울어본 적이 없고, 누굴 대 놓고 원망해본 적도 없다. 단 한 번도 소리내어 그 아이의 이름을 꺼내 본 적도 없다. 어머니는 가끔은 꺼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했고, 아끼던 자식이었는지를 말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할머니가 와 계셨다. 어머니는 또 눈물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더니 한마디를 하신다.
“ 저걸 데려가야 하는데…….”
“…….”
곧이어 할머니께서
“ 아이고, 무신 말이고.” 하며 어머니를 말리신다. 더 이상 어머니는 말이 없다. 할머니의 만류하는 말이 없었다면 나는 그냥 어머니가 또 저러나 보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할머니가 말렸다는 건 어머니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뜻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느낌과 그냥 비난을 받은 것은 차이가 있다. 그 말은 나의 미안함과 죄책감의 싹을 키우는 물이 되었다. 그 하나의 문장의 나의 심장을 관통했고 나는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말 한마디의 중요성. 올드보이라는 영화에서도 무심코 던진 말로 인해 오대수( 최민식)는 오랫동안 밀실에 감금된다. 무심코 던진 말이 유지태(이우진) 심장과 삶을 저격한 것이다.
자라난 죄책감은 내 삶의 변곡점이 되었다. 나는 변했다. 꼭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나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처럼 살면 안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말 많은 아이에서 말 없는 아이로 변했고, 생각 없이 사는 아이가 왜 살지, 어떻게 살지 하는 철학적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친하게 놀기만 하던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고 나만의 길을 가야겠다는 마음도 먹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온통 책을 읽는 아이로 변했다. 점심시간마다 지하 가사실에 한쪽에 책이 쌓인 도서실이라는 곳에 가서 책을 읽었다. 책의 굳은 내와 가사실의 여러 집기가 뭉쳐진 냄새가 진득하게 베여있는 곳이었다. 운동장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나를 찾다가 나중에는 포기했다. 수업 시간에도 멍청히 앉아 있는 게 최선인 내가 드디어 수업이 귀에 들어왔다. 국어 시간이었다. ‘은유법’ ‘직유법’이라는 단어였다. 처음으로 내가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들은 단어였다. 옆에 친구들을 봤다. 이미 다 아는 단어라는 느낌이다. 신기했다. 남들은 다 아는 단어를 지금에야 처음으로 들었다. 학교 공부에 마음을 쏟게 되었다. 공부는 하면 되었다. 말이 없어진 아이가 철학적 고민 비슷한 것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건 공부와 독서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