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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중지추 Jun 07. 2023

애도의 시간

1. 나는 울었다.

    그날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갑자기 집으로 친척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나 같이 말이 없고 얼굴이 무겁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이 없어도 뭔가가 착 착 착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 4시 정도가 되자 조용히 움직이던 친척들은 한꺼번에 집을 나섰다.  내 몸에서 뜨거운 액체가 갑자기 눈 밖으로 흘렀다. 흘러내렸다. 줄줄줄. .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곧이어 어머니의 울음이 시작되었다.

    

 그날은 학교에서 송충이를 잡으러 가는 날이었다. 각자 알아서 송충이 잡는 막대기를 가지고 와야 했다. 안 가지고 갔다. 선생님은 나를 점심때 집으로 돌려보냈다. 대문을 들어서니 연한 향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퉁퉁 부은 눈을 한 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우더니 외할머니를 모셔오라고 한다. 짜증이 났다. 난 학교에 다시 가야 하는데.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몸 쓸 애라는 듯이 역정을 애써 참으며 얼른 시골에 가서 외할머니를 모셔오라고 한다. 어머니는 나지막이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흘리셨다.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무시할 수 없었다. 동생이 할머니는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할머니와 아주 각별한 사이니까.

  외할머니댁까지는 버스 타고 1시간쯤 걸리는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별천지에 다녀오는 것만큼이나 먼 곳이었다. 짜증을 내며 버스를 탔다. 지나가는 바람이 답답했다. 학교 일이 걱정되었다. 학교에 다시 가야 하는데 어떡하지. 혼나는데. 할머니는 집에 안 계셨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심히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길고 길었다.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는데 헛걸음을 했다고 생각하며 대문을 들어서는데 외할머니는 이미 와 계셨다.

 그리고 그 옆에 한 분이 더 계셨다. 당시 어머니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심방을 찾아다니시곤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무당이나 점집 같은 건데 제주에서는 심방이라는 분이 집을 방문해서 아픈 자를 위해 치유와 치료를 위해 천지신명에게 기도도 하고 불안해 하는 이의 앞날을 점치기도 하고 기복을 빌어주기도 했다. 돌아가시는 분이 계시면 명복을 비는 일을 하기도 했었다. 그 심방이라는 분이 방으로 들어간다. 집안 전체에 향내가 진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방 밖에서 어머니는 서서 울고 계셨다.외할머니가 그 방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집안 전체에 향내와 독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왠지 학교에는 다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지는 순간에 독경 소리가 멈췄다. 영문도 모르는 유치원 다닐 나이의 막냇동생의 어깨를 안고 나는 저쪽 방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밤새 웅크리고 있었다. 그날 밤엔 잠이 오지 않았다. 왠지 자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둘 모인 친척들이 새벽녘에 한꺼번에 조용히 다 같이 나간다. 일이 다 끝난 건가 싶었다. ‘어린 애 무덤이니 부모가 모르는 게 좋아, 부모님은 따라서 오지 마세요’라는 대화가 귀에 꽂혔다. 그 친척들의 대화의 의미가 정확히 뭔지 당시엔 몰랐다. 방 한구석에서 나는 울기 시작했다. 아니 눈에서 눈물이 그냥 흘러나왔다. 핏줄을 잃어버린 본능적인 울음이었다. 친척분들이 다 나가고 조용한 새벽에 어머니의 울음이 시작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머니는 계속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소리내어 울 수 없었다. 밤마다 방에서 이불을 깨물며 혼자 울었다. 웬지 내가 소리내어 우는 건 적절하지 않게 느껴졌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내 안의 우울과 고통의 끝을 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릴레이 선수가 바통을 쥔 거처럼 확 부여잡고, 장난감을 갖고 싶은 어린아이의 악다구니처럼 쓰리라. 어린아이의 악다구니가 나에게 없었다면 오늘의 글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쓰고 싶지 않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많이도 운다. 아직도 그날 일을 떠올리며 울음이 난다는 게 신기하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읽으면서 난 동생을 떠올렸다. 그 죽음은 나에게 지독한 상실이었다. 나의 전 인격을 흔들어놓았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울어서 이젠 다 치유된 줄 알았다. 아직은 아닌가 보다. 좀 더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슬픈 일에는 누구에게나 애도의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글로 치유해 보려고 한다. 앞으로 차차     

 여동생은 백혈병이었고 2년 정도 아팠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한 학기 정도 다니다 2년 정도 투병 생활을 하다 죽음을 맞았다. 사람은 다 죽는데 왜 태어나는 걸까 라는대답없는 질문을 수없이 나에게 던졌다. 죽음과 삶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삶의 한가운데 있는 죽음은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아 나도 질식할 것만 같은 시기를 6년 정도 보냈다. 그리고 대학을 진학했다. 그집을 벗어나서 좋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죽음을 나름 공부를 했다. 삶이 끝나고 나서 오는 게 죽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컴퓨터의 전원이 꺼지는 것처럼 죽음은 전혀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면서 동생의 죽음에 애써 담담해지곤했다. 생물학적인 죽음과 동시에 정신적 영적 죽음도 같이 온다는 말이 좋았다. 죽음이 곧 ‘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아이의 고통도 이미 끝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아픔만 들여다보느라 동생에게 못한 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주 늦었지만, 동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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