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꽃고무신 신던 소녀가 동생들의 엄마가 되기까지
한 번은 결혼하고 처음 친정에 엄마 제사 지내러 갔었던 때야. 제사 마치고 다음날 다시 시댁에 돌아간디, 동생들 둘이 동창(나주 세지면 동창)까지 쫄랑쫄랑 따라온다 마다. 동생들이 그때 국민학교 2, 3학년이나 되았던가 몰라. 친정 집에서 동창까지 40분 거리나 돼야. 동창을 가야만 시댁 금정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거든.
따라올 때는 좋았제만, 띠어 놓고 갈란께 갑자기 동생들이 막 울면서 차에 오른다 마다. 나 따라온다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생들을 차에서 밀어부렀어……. (흐느낀다)
그럴 때 ‘뭣 할라고 내가 시집을 왔을까, 내 동생들하고 살 것인디…’ 함서 눈물밖에 안 나. 어린 동생들을 밀어 불고 버스 타고 간께 내가 오죽했긋냐. 시부모가 없이 나 혼자 가서 살믄 내가 데꼬 어떻게든 갈쳐라도 살지, 시부모가 계신디 동생들 데꼬 어쩌겄냐. 그것이 제일로 가슴 아파. 지금도 그 일이 제일 생각나. 이 얘기를 정말 못 하겄더라고… 지금까지도 그 말을 못 했어.
큰집 엄마도 그걸 지켜보면서 울었을 거야. 큰집 엄마를 친엄마만이로 막 그러고 살았어. 제사 때면 와서 다 상 차려주고 그랬제.
내 바로 밑에 여동생은 일찍 세상을 떠났어. 한 오십 살에 갔을 거야. 객지에서 살았는데 천주교 신자였어. 교인들이 기도원에 들어가서 밥을 안 먹는 그런 것이 있드만(당시 기도원에서는 며칠씩 금식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거 하면서 죽었다 하드라고. 엄마 없이 자라서 고생만 하다가 죽은 걸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워. 그래도 내 자식들 있으니까 차차 잊어지더라고…….
지금도 친오빠 형제간, 큰 집, 작은 집 언니, 동생들하고 연락해. 어저께도 이모하고 전화하고, 오빠하고 전화하고. 몇 년 전에도 집안 오빠들, 동생들 만났어. 얼마나 나를 그렇게 좋게 본지 몰라.
막둥이 여동생이 서울서 지금 살고 있는데, 나를 엄마로 생각해. 내가 한 번은 물었어. “너 엄마에 대해서 언제 젤 그리움이 들디?” 하니까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없어” 그래. 그때 세 살 때여서 엄마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전혀 기억이 안 난대. 내가 어른(시부모) 밑에서 산께 저 애기 낳다 해도 가보도 못한 것이 지금도 제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