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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시 Mar 30. 2024

나의 남다름을 알게 된 건, 그때부터

<매쏘와 켄터키 치킨샐러드>



초록색 참이슬 후레쉬 하나, 매화수 하나를 준비한다. 두 병 다 뚜껑을 따버리고, 병 주둥이가 맞닿게 매화수 병을 뒤집어 올려 소주병 위에 세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매화수 병을 뒤집는 스피드다. 열려있는 입구로 술이 쏟아지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순식간에 홱 뒤집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깨끗한 명함 한 장을 사용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명함으로 입구를 눌러 막은 채 병을 뒤집고 소주병 위에 올린 다음에 명함을 살살 빼내는 방법이다.      


연결된 병 입구로 소주와 매화수가 섞이기 시작한다. 살굿빛의 매화수로 투명한 소주가 섞여 들어오면서 아지랑이처럼 아롱아롱한 흐름이 생긴다. 뒤집힌 매화수 병의 주둥이부터 점점 투명해지며 꽤나 한참을 천천히 섞인다. 울렁울렁 실 같은 곡선을 그리며 병 속을 빙글빙글 도는 물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홀린 듯 묘하게 집중하게 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남다름을 알게 된 것은 21살 대학교 새내기 때였다. 그 시절 내 별명은 '태양'이었다. 술을 해가 뜰 때까지 마시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내 주량을 잘 몰랐던 나는 술자리에서 선배들께 술을 받는 족족 사양 없이 전부 마셔버렸는데, 먹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새내기에게 은근히 술을 강요하던 선배들은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나를 '빼지 않는다'며 치켜세우고 재미있어했는데, 몇 시간 만에 전부 내 앞에 고꾸라져 있었다. 

그런 탓에 붙어버린 이 별명은 선후배와 친해지는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별명에 따르는 기대 때문에 난감하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보통 이상의 주량을 타고났을 뿐, 알콜의 쓴맛을 도저히 즐길 수 없어 술이 싫은 나로서는 괴로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최애' 술은 있었다. '매쏘'라 불리는, 매화수와 소주를 1:1 비율로 섞은 폭탄주다. 소주와 매화수가 서로의 단점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이루어낸 찰떡궁합의 맛이다.     


나에게 '매쏘'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대학 시절 소개팅으로 만난 한 살 연상의 남자친구, '꿀벌'이었다.      


"매쏘라고 알아? 맛있어, 한번 마셔볼래?"     


소개팅 이후 한 달간의 데이트 끝에 사귀기로 한 대망의 '1일', 기념으로 한잔하기 위해 찾은 호프집에서 그는 탕 안주와 매화수 한 병,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그는 줄줄 새는 매화수에 손을 적셔가며 병을 뒤집어 소주병 위로 딱 붙여 얹어놓았다. 병 속을 빙글빙글 도는 알코올 아지랑이. 그런 방식으로 술을 섞는 것을 처음 봤던 나는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다.     


"우와- 이거 섞이는 거 봐! 역쉬 '이과' 오빠!"      


사랑의 오버액션. 물론 ‘이과’는 별 상관없다는 것은 나도 알았지만, 그저 뭐든 다 엮어다 칭찬하고 싶던 때였다. 눈에 거대한 콩깍지를 장착한 상태였으니까. 내 리액션에 으쓱해진 꿀벌은 어서 맛 한번 보라며 매쏘를 얼른 한 잔 따라주었다.     


홀짝 마셔 본 매쏘는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그냥 단독으로 마실 땐 그렇게 쓰던 소주가 다른 술과 섞였다고 몰라보게 달아졌다. 소주의 머리 아픈 알콜 냄새가 매화수의 향기에 싹 잡혀 사라졌다.      


'근데 이거 무슨 냄새지? 왠지 아는 냄샌데..? 

아! 맞다, 매실이다!'     


그렇다, 매화수는 매실주였다. 매실 특유의 달달한 향긋함에 은근히 한약 같은 느낌도 살짝 섞인 오묘한 향. 적당히 달짝지근하면서 거부감 없이 부드럽게 싸악 목으로 넘어가는 맛. 목에 탁탁 걸려 맘먹고 꿀-떡 삼켜야 하는 소주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 매쏘는 내 입맛에 딱 좋았다. 여태 술은 억지로 먹어본 적밖에 없던 나도 거부감 없이 술술 마실 수 있었다. 이거 정말 맛있다!      


우리는 훈훈한 분위기에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대작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게 술을 따라주는 중간중간, 꿀벌은 ‘잘 마시니 권하기 부담 없어 좋다’는 둥 우리 학교 주당 선배들이 하던 얘기와 똑같은 말을 했다. 저리 말하는 걸 보니 꿀벌도 술을 좋아하나 보다, 했다. 선배들이 말할 땐 은근히 내게 부담 주는 것 같아 기분 나쁘게 들렸는데 꿀벌이 말할 땐 그저 기분이 좋았다.   

  

꺾어 마시는 법 없이, 두 명이 원샷으로만 척척 술을 비웠더니 매쏘는 금세 동나버렸다.     


좀 더 마실까? 물으며 꿀벌은 메뉴판을 펼쳤다. 먼저 메뉴는 자기가 골랐으니 이번에는 내가 술과 안주를 고를 차례라며 주문을 맡겼다. 나는 해맑게 답했다.     


“이거 너무 맛있는데, 매쏘 한 번 더 먹을까?”     


“....어? 그, 그래?”     


순간 꿀벌의 얼굴에 어린 당황의 빛을 나는 포착하고 말았다. 허공을 응시한 눈동자가 좌우로 우왕좌왕 빠르게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래, 알시가 먹고 싶다면 먹어야지’ 했다.  

   

뭐지?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이번에는 내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나는 뭐가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꿀벌이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해 버리니 왜 그러냐고 캐묻기도 어려웠다. 뭐지? 뭐 때문에 그랬지?

속으로 몰래 눈치 보던 나는 나름의 답을 추측해냈다. 매화수는 소주에 비해서 가격이 비쌌다. 아예 못 사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몇 병씩 계속 시켜 먹기엔 대학생 신분에 부담되는 가격이긴 했다.     


꿀벌은 그래도 소주와 매화수 켄터키 치킨샐러드를 시켜주었다. 두 번째 매쏘를 제조할 때 첫 번째보다는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지만, 기왕 시킨 거 남기는 게 더 돈 아까운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잘 먹자고 마음을 먹었다. 자 자, 즐겁게 짠 합시다! 짠!     


매쏘도 여전히 맛있었지만, 안주로 나온 켄터키 치킨샐러드가 무척 맛있었다. 그런데 치킨 한 조각의 크기가 과자 '치토스' 만해서 영 집어먹을 맛이 안 났다. 맘 같아서는 두세 개씩 한 번에 막 집어 먹고 싶었는데, 이미 탕 안주도 잔뜩 먹어놓은 상태여서 가까스로 자제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먹거나 식탐 있는 이미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내숭'을 좀 떨어야 할 것 같았다. 꿀벌도 벌써 배가 부른지 나보다 더 깨작거리고 있는 중이라 더더욱 참을 수밖에 없었다.     


치킨을 쥐콩 만큼 집어 먹는 데에 집중하며 어느새 새 매쏘를 반 병쯤 비웠을 때였다. 건배하기 위해 내가 잔을 들이밀자, 왠지 머뭇거리던 꿀벌이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알시야, 내가 절대! 절대 취한 건 아닌데, 지금 왠지 좀.. 속이 안 좋아서 나는 그만 마실게."     


뭐?!

번쩍 고개를 든 나는 그제야 은근히 해쓱해진 꿀벌의 낯빛을 알아챘다. 여태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것들이 퍼뜩 떠올랐다. 매화수 도수는 얼마나 되지? '보통' 사람들은 매쏘는 '적당히' 몇 병쯤 마시지? 혹시 지금 너무 많이 마신 건가?     


아까 꿀벌이 당황한 이유는 가격 때문이 아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였다.

망했다. 치킨을 쥐콩 만큼 먹니 마니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내숭의 방향이 영 잘못됐지 않는가. 내숭은 망했고 이미지는 물건너갔다.

나는 깜짝 놀라 잔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뒤늦게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했다.     


"나, 나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그만 먹어야겠어. 취한 것 같아!"     


그 말을 믿어주기엔 너무 말짱한 얼굴이었다. 꿀벌은 피로한 얼굴로 파스스 웃었다.     


"알시는 더 먹고 싶으면 먹어, 오빠는 괜찮아..“     


역시 씨알도 안 먹혔다.     


이후 우리는 다 못 먹은 술과 음식은 그대로 남기고 술집을 나왔다. 꿀벌은 계속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점점 더 파리해지는 그의 안색에 나는 그를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술집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같이 가기로 합의하고 역에서 헤어졌다. 꿀벌은 못 데려다줘 미안하다고 자꾸 말했지만, 나야말로 그의 귀가가 걱정됐다. 기분 탓인지 왠지 비틀거려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그날은 망한 이미지메이킹에 대한 창피함과 그의 걱정에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강권하는 술 문화는 근절하자는 추세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음주를 강요하고 술을 잘 마시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는 집단은 아직도 많다.     


서른이 한참 넘은 지금에도, 회식 날이면 '섭섭하게 내가 주는 술을 (감히) 안 받을 거냐'는 말을 대여섯 번은 듣는 것 같다. 매번 지겹게 거절해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말이다. 병을 이유 삼아도 '자기도 아프다'든지, '그 정도 아픈 건 그냥 먹어도 괜찮다'든지, 무책임하게 우기는 사람들 때문에 순간 부아가 치밀 때도 있다.     


'오냐, 그렇게 바란다면 다이다이로 한번 죽을 때까지 마셔볼래? 내가 작정하면 너 죽어.'     


나도 마음의 심연엔 '술부심'이 있었는지, 이런 말이 울컥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 술부심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다. 많이 마셔봐야 건강만 망치고 이미지만 망가지는 법이다. 애써 웃으며 다시 한번 사양한다.

흑역사는 한 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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