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나 사이

<문장을 통해 나 들여다보기> .1

by eend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 마음 산책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세계 여행의 경험 같은 것이라기보다 개인에게 닥친 고통의 경험에 가깝다. 사람이 살면서 고통은 피해갈 수 없는데 실망, 좌절, 고통, 실패....이런 경험들을 내가 어떻게 직시하고 끌어안고 다시 털고 일어나 걸어갔는가, 에 대한 경험치를 말한다. 여기서의 차이가 한 사람의 가장 선명한 개성과 사유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동시에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는 생각의 여지를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자기 소신이나 주관이 있어야 하지만 단정 짓고 결론짓는 사람들은 아니다. 흐릿한 부분은 흐릿하게 남긴 채 그 모호성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이 아닐까.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 마음산책 > 중 '고통의 경험이라는 자양분' 중에서 P.128


나는 어떤 일을 맞닥들였을 때 순간적으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매번 했던 것 같다. 나도 내가 이렇다는 것을 몰랐는데, 항상 그랬다는 것을 남편의 암을 마주하게 되고, 항암과 함께 많은 시간을 경험하면서 알게된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밝다, 긍정적이다. 괜찮으니 다행이다'라는 말을 곧잘 하곤 했다.

남편이 위암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남편과 함께 절에 가면서 남편엑 한 말은

"당신은 살면서 정말 힘들어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는 순간을 마주한 때가 있어?" "있지..."

"그래? 그럼 됐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그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내고 지금 잘 지내고 있잖아. 그럼 된거야. 그럼 이 사람에게는 이 아픔 또한 이겨낼 힘이 있을테니까. 그래...참 다행이야."

내가 그런 질문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을 지 모르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아빠의 대수술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밤새도록 피를 토하던 아빠가 어느 날부터 안보였고, 병원에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다. 엄마는 그 시간을 오롯이 두 어린 자식들과 함께 견뎌냈다.

수술을 하는 의사도 수술 도중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길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아빠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남편의 위암 선고를 받고 정말 단 한 번도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건강검진 기간이 지난 남편의 검진을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와서 다시 하도록 해준 간호사가 너무 고마웠고, 아산병원에 있었던 이력으로 수술 의사까지 다이렉트로 정해주던 이지은 의사 선생님도 고마웠고, 남편의 항암 시간동안 우리 아이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인양 돌봐준 이웃 사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만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정신을 차리고 산 것이 신기하다는 말들을 지인들은 곧잘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줄을 붙들고 살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남편의 수술 날짜를 잡고 돌아오던 날, 오직 남편의 상태만이 걱정이 되어 규리와 선우를 데리고 있어주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데 엄마는 계속 전화를 받질 않았다. 창원에서 서울까지 그 먼 거리를 운전해준 건 친정 아빠였다. 아빠에게 말을 해도 아빠도 모른다고 하고 나는 남편이 피로할까봐, 배가 고플까봐....오직 그 걱정만 되어서 엄마에게 줄기차게 전화를 했다.

잠시 후 시누이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지금 응급실에 계셔..."

정신이 아득해 지는 순간,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게...그렇게 우리는 아산병원에서 파티마 병원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남편이 충격을 받을까봐 남편은 시댁에 데려다두고 왔다. 무슨 정신에 그랬는지...거참...


아빠는 우리가 놀랄까봐 서울에서 창원까지 오시면서 그 떨림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시고 오셨던 것이다. 그것도 나중에서야 생각이 났다. 나는 남편이 이렇다고 이 호들갑을 떨었는데, 아빠는 아내가 그런 와중에 딸과 사위를 생각해서 그 먼거리를 운전하고 돌아오시면서 얼마나 마음을 움켜지고 계셨을까?

(아빠의 마음 여림을 가장 잘 아는 엄마는 중환자실에서도 아빠만 찾았고, 아빠를 잘 챙기라는 말 밖에 안했던 것 같다.)

"관상동맥이 거의 90프로 이상이 막혔습니다. 당장 수술을 하거나 스텐트 삽입을 해야합니다...."

그 와중에 참 다행인 것은 엄마의 뼈가 너무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향후 길게 본다면 수술이 좋다는 의사의 말에 우리는 그렇게 다시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2013년. 1월

가장 든든한 나의 편....엄마와 남편이 같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엄마는 8층, 남편은 6층...우리에게 2013년은 아팠던 기억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엄마도 남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고마운 순간이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그렇게 아파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 말에 이렇게 아픈데 왜 자꾸 돌아가라고 하느냐고 말했고, 그 순간 옆에 환자가 위독해서 달려온 심혈관내과 전문의가 엄마를 보게 되었고, 엄마는 그 시간 이후 휠체어도 아니고 침대에 누워서 검사를 받으로 다녔다. 큰 일 날뻔한 순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우리 가족에게 2013년 이후의 생활은 하루하루 견디는 삶이었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다거나 '왜 이런 삶이 내게 주어졌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길 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났다고 이야기도 하지만, 그 당시 내가 힘든 경험을 마주하는 자세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였다.

남편이 아픈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내가 엄마와 남편을 동시에 잃을 뻔한 경험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러니 우리는 슬퍼하고 힘들어할 시간에 잘 이겨내고 헤쳐나가자는 것...그 마음이었다.

가끔 이전의 힘든 생활들을 잊고 다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 순간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웠었는지를 잊고...그럴 때면 스스로 이야기 한다.

'니가 이제 그런 생각을 하는 거 보니 많이 여유로워지고 살만해졌구나. 그런 게 섭섭하고, 그런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나에게 남편과 엄마의 아픔은, 무한한 고마움으로 그 순간을 극복하게 만들어 준 경험치가 되었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오롯이 마음을 다해서 대해야한다는 것....그것으로 귀결되었다.

항암 치료는 남편이 혼자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잠시 한 눈을 팔면 남편은 혼자 일어서다가 나둥그라져 있었고, 우당탕당 소리가 나면 욕실에서 넘어져있곤 했다.

어린 아들 딸들도 아빠는 언제나 부축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들의 유치원 버스 타러 가는 시간은 주변의 엄마들이 도맡아 줬었다. 그런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할 때,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 사촌이 훨씬 도움이 될 때가 있어. 마음을 전할 때는 아끼지 말고 줘야해."

엄마는 나에게 말했었다.

그렇게 나의 아픈 경험은 내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를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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