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크리스마스 이븟날,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아무데나 던져놓고 살기 때문에 전화를 잘 받지 않는 내가 용케 한 방에 전화를 받았고, 친구는 축하할 만한 소식을 3개나 전했다. 축하할 일 없는 나에게 그는 조언을 구했고, 나도 잠시 나를 잊고 연산하는 머리를 굴릴 수 있었다. 그는 산책 중인 것 같았다.
어제, 크리스마스 이븟날 밤, 나는 오랜만에 1954년 영화, "십계"가 문득 생각이 났다. 찾아서 다시 봤다.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엔 크리스마스 이븟날엔가 당일날에 (이 부분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미국 동부와 한국의 시차를 오차로 감안하면 오차 범위 내일 것이다) 공중파에서 "십계" 등 기독교 영화들을 틀어주던 걸 아마 기억할 것이다. 없는 향수를 구태여 불러 일으킨 다음 달래려 봤는데, 도리어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 내용에서 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올해의 미국 동부는 겨울이 따뜻하다. 나는 오늘 강변을 2마일 정도 달리고 왔다. 간밤엔 비가 왔고, 끼고 나간 장갑은 달리며 금새 벗게 되었다. 달리는 도중, 강 건너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건조하게 반복되는 평소의 종소리와는 달리, 어떤 멜로디로 들렸는데 익숙한 이런 저런 멜로디들이 섞이어 있어, 잠시 뜀박질을 늦추며 귀를 기울였다. 귀도리가 필요 없었단 것이 다행스럽다.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겠다고 약속을 잡았었다. 며칠 전, 그 약속은 취소되었다. 크리스마스 음악들을 모아봤다. 들으면, 그 음악들은 내가 이미 아는 음악들이었다. 파네토네 등 크리스마스 음식들을 준비했다. 먹으면, 나는 그 맛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처럼 사려 깊은 모든 준비들은 내게 아무런 기적도 되지 못했으다. 이븟날의 그 어떤 불안한 크리스마스 파티들 역시도 내게 어떤 기적이 된 적은 없으나, 위의 3개 돌발적인 사건들은 하나 같이 새로웠음이 흥미롭다.
분당 수내역 인근에서 자란 내 기억 속의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고요한 밤과 낮이다. 그래서 숨 죽인 기적들이 만연하다. 평균과 바이어스가 많은 머릿속에 모든 편차는 기적처럼 느껴지나, 크리스마스는 보다 고요하며 보다 특정하기 쉽다. 따라서 그 고요함이란 그 어떤 기적과 기적 아닌 것들이 쌍쌍으로 무수히 존재하는 바다처럼 느껴진다.
또한 크리스마스엔 모든 참호들이 메워진다. 전화기 너머의 친구나, 하루 건너 그의 산책과 나의 뜀박질이나, 스크린, 그리고 성경 너머 어느 예언자의 투쟁이나, 또는 강 건너 교회의 이름 모를 종소리는, 모두 크리스마스에 나를 일깨우는 기적들이다. 기적 아닌 약속, 기적 아닌 맛, 기적 아닌 음악의 안에서 으레 관찰자로서 존재하는 나에게 통 밖의, 반드시 계산할 수 없는 세계를 알려오는 목소리들이다.
크리스마스 날의 고요, 그 고요 안의 소거된 목소리들과, 그 고요 위에서 나를 불러오는 목소리들이 있다. 그 목소리가 곧 나의 매장(embedding)인 것을 신실하게 나는 믿는다. 그러면 올해를 착하지도 울지도 않고 보낸 나는, 오로지 한 해의 남은 일주일을 마저 연평균으로 보낼 것을 바라며, 부디 내년에도 이처럼 기적이 뜨문뜨문한 삶을 살도록 해주십사고 그 어느 평균적인 신자처럼, 땀을 식히는 와중에, 모이지 않은 손으로 빌며, 이 글은 나로 인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