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약간은 어른이 된 기억이 있는가? 필자는 인생이 거진 간접 경험이라서, 있다. 서유기를 읽었던 초등학교 때, 나는 15소년 표류기나 해저 2만리도 읽었었다. 동화책이나 독수리 5형제의 연장선인, 발랄하고 호장한 모험 이야기들을 나는 참 좋아했다. 머리가 좀 크고 나선 삼총사 같은 건 유치해서 못 읽겠다고 꺼드럭거렸고, 대신 돈키호테나 모비딕, 장발장의 어린이 판을 좋아했다.
중학교에 들어서서 데미안이니 수레바퀴 아래서니 호밀밭의 파수꾼이니, 어린 왕자니, 아니면 올리버 트위스트니, 파우스트니 하는 그런 소위 "청소년 권장도서"들을 읽었다. 하지만 그것들도 내게는 모험 얘기였고, 정작 나를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만든 것은 두 권의 책이었다: 파리대왕과 광염소나타. 필자는 복이 많아서, 인간의 악한 마음을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청소년이 되었다. 15소년 표류기를 기대하고 읽었던 파리대왕은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이야기 전개를 이해하는 데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광염소나타의 경우 그와 같은 배신감은 없었지만, 그런 범죄 행위를 "사건 25시"나 "경찰청 사람들" 같이 안전한 스크린 너머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미치광이 주인공 바로 옆에서 보는 것 같은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거기다 시립 도서관에서 중학생에게도 대출이 되길래 음악 얘긴가보다 하고 빌려와서 보다가 무방비하게 얻어맞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 고등학교에 들어서서 다시 읽은 돈키호테는 비뚤어진 세상에 대해 투쟁하는 비뚤어진 인간의 이야기가 되었고, 레미제라블은 시대에 휩쓸린 "Misérables"들의, 그리고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면서도 소설 안에서 벌해야만 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빅토르 위고의 이야기였다. 디킨시안 코메디들은 끊임 없이 인간과 사회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디킨스가 마지막엔 손을 내밀고야 마는 그런 이야기가 되었다. 달과 6펜스는 이미 아는 이야기가 되었고, 싯달타로 다시 만난 헤세는 괴물이었으며, 백경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였다.
그게 실수였다. 전생의 공덕을 현생에 다 까먹는 중인 필자는 늘 착하고 성실하며 관대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어른이 되는 길을 책 속에서 찾았다고 생각하게 되고야 만 것이었다. 수많은 청소년 권장도서들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고, 카프카의 "성", 베케트의 희곡들, 그리고 샤르트르와 카뮈는 내 고교 독서의 끝자락에 무한한 환희와 착각을 더해줬다 - "아직 나는 더 어른이 될 수 있어!"
그래서 그 이후로도 나보코프니, 오스터니, 체호프니, 우파니샤드니, 시집이니, 인문학 고전이니, 하여간 아무런 체계 없이 잡히는 대로 디비 파며 어른이 되는 길을 활자 속에서 찾다가, 스물셋에 군대를 가서 한 번 와장창 깨어지고 나선 그 따위 삽질을 관두었다. 책으로 쌓아올린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이란! 훈련소 침상에 누워 나보다 더 배움이 깊었던 동기와 노가리를 까다가 "책 속에서 답을 찾아선 안 되는 거니까요!"라고 뭔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가 한참을 혼났던 그 밤의 기찻길 덜컹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제대 후, 나는 주변을 둘러보게 됐고, 내가 책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동안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려 매진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사회 경험을 쌓았고, 누군가는 역사와 시사를 깊이 공부했으며, 누군가는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거기서 십수 년이 더 지나, 이제 누군가는 부모가 됐고, 누군가는 대표가 됐고, 누군가는 벌써 은퇴를 했다(!) 그토록 착하고 성실하며 관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다가도 다 같이 하하호호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그간 읽은 것들 덕분일 텐데, 그러면 문득 나의 정신적/사회적 연령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의문쯤 이젠 등 뒤로 가볍게 던져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이거랑, 요즘은 본업이 바빠서 독서가 부족해졌는데, 조만간 (아마도 2~3년 쯤 뒤에...?) 시간이 나게 되면 책을 많이 읽고 싶다. 이제는 책들이 어떻게 읽힐까. 그 생각을 하면 약간 설레는 거랑, 이 둘을 생각하면 나는 그 새 조금 어른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