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선배에게 칭찬을 한 적이 있다.
“선배님, 오늘 옷이 너무 잘 어울려요.”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에는 별로였다는 거야~?”
전에 한 번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선배님, 오늘따라 얼굴 좋아 보이세요. 푹 주무셨나 봐요.”
그땐 이렇게 되물었다.
“왜, 내가 나이 많아서 잠 적게 잘까 봐? 전에는 푸석했어?”
나는 늘 이런 식의 반응이 불편했다.
그래서 해명 대신, 능청스럽게 넘겼다.
“왜 그렇게 받아들이세요, 또~”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뭐가 걸렸다.
이제는 예전처럼 웃고 넘기지 않는다.
무례하게 말하거나 꼬아 듣는 사람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건다.
선을 넘었다는 걸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만,
상처 없이 전하려 한다.
늘 말 못 하고 혼자 곱씹던 성격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그 순간에 말할 수 있도록
집에서 연습도 많이 했다.
물론 지금도 상황 앞에 서면 말이 잘 안 나오고, 마음이 멈칫하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배와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 선배는 이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장난으로 던진 말을
상대가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좁다”
“유하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나는 달랐다.
A가 무례하게 들리는 말을 할 때,
앞으로는 선을 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자리에서 내 입장을 표현하는 연습을 해왔다.
하지만 A는
자기 말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을
‘마음이 삐뚤어졌다’고 여겼다.
내가 선을 긋는 걸 보고
A가 자신의 말이 무례했다는 걸
스스로 깨닫길 바랐다.
하지만 A는
자기 장난을 안 받아주는 사람은
불편하다는 말을 한다.
그때 알게 되었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상대를 자기 기준에 끼워 맞춘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래서 진심도, 진실도 오해 속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사람들은 자기 안의 잣대로 판단하고 말한다.
그 오류를 줄이기 위해선
매일 나를 돌아보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결국 모든 판단은
내가 세운 하나의 기준일 뿐이니까.
나는 오늘도 그런 걸 배운다.
나만의 옳음을 강하게 믿기 전에
혹시 나도,
누군가를 내 기준으로 재고 있진 않았을까.
A 선배 덕분에
그 질문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