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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Mar 16.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9-1

탈레스와 철학의 탄생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 입니다. 



오늘날 누군가 만물은 물이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어디 산 속에서 혼자 도를 닦는.. 조금 이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탈레스이지요. 상당히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정수기 이름을 탈레스로 정해야겠습니다. 

탈레스가 어째서 철학의 아버지로 여겨질까? 일단 너무나도 유명인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자기 책(형이상학)에 써놨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역시 사람은 후대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좀 더 그럴싸한 이유는 없을까요?     


대표적인 대답은 탈레스가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의 이행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먼저 신화의 시대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모든 면모를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까, 대표적으로 호메르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특히 오늘은 스테픈 힉스(Stephen Hicks)라는 철학자의 생각을 좀 가져왔습니다.)


호메르스는 탈레스가 살기 100~200년 전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리야드, 오디세이 두 개가 있죠. 이름이 낯설을 수 있어도, 다들 아는 겁니다. 제우스, 아폴로 같은 신들도 나오고, 오디세이, 아킬레우스 등의 영웅들도 나와서 전쟁하고, 트로이 박살내고, 또 모험을 하는..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같은 걸로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이야기들이죠.      


이런 서사 속에는 당시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관이 녹아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매너남 헥토르의 죽음을 살펴봅시다. 그리스 연합군 쪽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게 아킬레우스였다면, 트로이 쪽 싸움 일타는 헥토르였습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대장 아가멤논이랑 사이가 안좋았습니다. 여자와 자존심 문제였지요. 아킬레우스가 없으니, 그리스군은 트로이군에게 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군이 밀리든 말든 아킬레우스는 관망만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아킬레우스의 친구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인들의 사기를 복돋우다가, 헥토리에게 끔살 당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트로이 입장에서도, 가만히 있던 아킬레우스의 심기를 건드린 불행한 사건이 되고 맙니다.      


괴물 같은 아킬레우스는 등장과 함께 트로이인들을 엄청나게 몰아 붙입니다. 트로이 사령관이었던 헥토르 입장에서는 아킬레우스를 가만 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둘 사이에 목숨을 건 일기토가 성사되죠. (트로이라는 영화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에게 대결을 거는 모습은 명장면이죠.)      


이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아주 얄밉게도 안전한 곳에서 자기들끼리 쑥덕대고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사이의 싸움을 어떻게 결판내면 좋을지 신들에게 물어봅니다. 아테네가 제우스에게 헥토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제우스의 허락을 받은 아테네가 상황에 개입하고, 헥토르는 위기에 빠집니다. 신들의 방해로 이렇게 되니, 결국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창에 목이 꿰뚫려 죽게 되지요.


다시 철학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이 이야기를 보면, 신들의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제우스와 아테네의 대화가 사건의 결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죠. 신들이 원하면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세계관이 깔린 겁니다. 인간보다 신들이 우선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 인간은 그 앞에 나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신들이 완벽한 존재들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에 따라서 변덕스럽게 선택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호메르스가 바라보는 세계는, 변덕스러운 신들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였던 거죠.  (호메르스에 등장하는 진짜 신은 운명이라는 다른 해석도 있지만, 그 운명도 인간(과 신)의 이해에 벗어나 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이면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다. 

이 초자연적인 힘은 변덕스러운 신들이다. 세계는 우연적이다.      


이것도 분명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은 철학적이라고 불리진 않습니다. 왜 그럴까. 먼저 이것은 그냥 옛날부터 전승되어왔던 이야기입니다. 신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까요. 또 신들이 변덕스럽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화에 해당하는 뮈토스라는 말도, 전해들은 이야기라는 뜻!) 그냥 옛날부터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신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내용들을 가지고 그냥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 뿐이죠. 심지어 이 세계는 사실상 신들의 변덕에 내맡겨져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있습니다. 두려운 것이고, 예측과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죠. 

     

탈레스의 세계관은 좀 다릅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가집니다.      

첫째, 세계 이면의 근본적인 질서를 신으로 보지 않고, 자연물로 보고 있습니다. 호메르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신들이 썰전 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탈레스는 “아휴 등장 인물 너무 많아. 하나로 정리합시다.”하면서 자연물인 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물은 경험 가능하잖아요? 물이 순환하고 변화하는 현상은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하는건, 우리가 물을 가지고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 세계가 신들에 의해서 변덕스럽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잡힌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를 자연물로 삼는다는 것은, 세계의 질서를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탈레스에게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보입니다만..) 신의 변덕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탈레스에게 있어서 세계는 이해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죠. 탈레스의 만물은 물이라는 말은, 세계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탈레스 이후로, 이성에 기반한 세계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이면에는 자연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다. 

자연적인 힘은 질서 잡혀있다. 세계의 질서는 탐구 가능하다.      


인간은 더 이상 신들의 변덕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고, 또 과거로부터 전승된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철학의 시대의 특징은 세계에 대해 탐구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잠재력을 발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겁니다. 물론 탈레스가 만물은 물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한 순간에 인간의 지성적 흐름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가 지나면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바뀐 것이 탈레스의 말을 통해 드러났다고 봐야하겠지요. 탈레스는 이러한 사유방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또 탈레스를 이성의 화신이라고 보는 것도 오해일 것입니다. 사실 탈레스에게는 여전히 신화적인 주제와 신화적인 성격이 많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탈레스가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면, 이제 우리는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하나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영 철학이라든지, 내 삶의 철학이라는 표현 등, 이 용어를 다양한 곳에 사용합니다. 그리고 대략 이것은 어떤 선택이나 태도의 근본적인 이유나 패턴을 의미하곤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탈레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와 나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시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철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나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신화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시험에 붙은 것은 신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올해 나의 사랑이 떠나간 것은 사주팔자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철학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철학이 되고자 한다면, 그 대답이 무엇이든간에, 그 이면의 질서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차차 밝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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