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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Jan 25.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2

스토아 철학자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야...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사실 노예로 태어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입니다. 아마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질색할 것 같아요. (적어도 저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보면 어떤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더럽고 미천하며 죽어도 싼 존재라고 말하는 댓글들이 차고 넘치지요. 퉁가에 화산을 터졌을 때, 차라리 중국에서 터졌어야 한다는 댓글이 베스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고 슬픈 기분마저 듭니다... (뉴스 기사 참조) 물론 인터넷 댓글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을 반영하진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겠지요. 그러나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우리나라 문화 속에 은근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기에, 안타까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네요. 


이렇게 반론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중국인을 욕하는 것은 그들의 “경향성”이나 “문화” 때문이라고. 폭력적으로 굴면서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하며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느냐고. 그들이 변화하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겠노라고. 이런 생각에 굳이 딴지를 걸면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타자를 나와 같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혹이 남아있는 한 나는 계속 슬프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000년도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살았던 동네는 인구가 기껏해야 십몇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도시국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 비교하자면 아주 작은 세계에 살고 있었지요. 더욱이 그 세계는 배타적이었습니다. 콜롬비아 대학교의 데이비드 존스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 시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세계관을 물려받았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읽어보세요!)

첫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고자 한다면, 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 정도 크기의 조그만 사회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마다 타고난 능력이 엄청나게 달라서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두 전제를 당연하게 보았습니다. 그가 아테네의 고상한 문화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만이 뛰어나고, 노예들이나 그 외의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태생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이런 문화적 전제들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뛰어난 윤리학자이고, 정의 개념에 대한 철학적 역사에 있어서 그의 업적은 눈이 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좁은 세계관에 입각하여 정의란 오직 동등한 인간들 간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동등한 폴리스의 시민이라는 특별한 유대의 끈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노예와 외국인에게 동등하게, 혹은 정의롭게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는 그들과의 관계는 애초에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서해 앞바다에서 중국 어선이 불법 조업하다 난파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해경은 그들을 구출하였지요. 저는 일단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여 법적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그들의 죄를 정의의 영역 내에서 처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한 댓글에는, 빠져 죽게 내버려두지 도대체 그들을 왜 구하냐는 베스트 댓글들이 많았습니다. (기사 참조) 이런 글에 공감을 누른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정의의 영역” 밖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중국인이 불법조업을 했다면, 이것은 애초에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감각이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려받은 좁은 세계관은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도시 국가 중심의 그리스의 시대가 지나가고, 제국 로마의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살고 있는 폴리스 내에서, 노예와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하고, 그 차이가 노예가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정당화할 만큼 결정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나타나면서, 여러 민족들이 통합되고, 활발한 교류가 일어납니다. 이런 역사적 변화 속에서 인간의 차이가 아니라 공통점에 주목하고, 그 공통점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스토아 철학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언어나, 신체적 유사성, 각자가 처한 지위나 신분이 인간다움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혼의 불꽃, 즉 “이성”에 주목하였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지요.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나의 생각을 돌아볼 수 있고, 나의 선택이 공평한 시각에서 볼 때 선할지 악할지 유익할지 해로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성”이 단순히 무엇인가를 계산하고 추리하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주는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영혼에 깃든 이 불꽃은 우리의 거대한 질서를 이해하고 파악하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지요.


로마의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이기도 한, 최초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이 이성이라는 영혼의 불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몸이며 동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서로를 미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로마의 황제로서 수많은 민족들과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결국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수많은 차이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하여 이것으로 세계의 시민들을 하나로, 한 몸으로 묶고자 한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이자 로마의 저술가인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을 파악한 다음에 자신이 어느 특별한 지역의 시민으로 인간의 벽에 막혀 있지 않고, 불멸의 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 하나의 도시 같은 세계 속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이 (...) 자기 자신만을 알게 되겠는가!" (키케로, 법률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좁은 폴리스 사회에서 통용되는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이성적인 인간은 “세계 시민”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성의 능력을 똑같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것처럼 타고난 것이 아니며, 교육의 차이일 뿐이라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각했지요. 우리는 세계 시민으로서 서로의 고결한 잠재력을 북돋아 줄 의무를 지닙니다. 또 우리는 모두 이성을 통해 파악 가능한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법이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았으나,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들의 법의 정의로움을 보증하는 더 근본적인 자연법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요컨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정의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시선은 2000여 년을 지나 지금 우리 사회에도 고고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의 차이보다 인간의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 공통점을 통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근본적인 층위에서 동등하다는 인식을 일깨웁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사상이 노예제를 폐지시키는 실천적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을 서둘러 덧붙여야겠습니다.) 또 스토아 철학자들의 자연법사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 권리에 대한 인식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걸쳐 재탄생하지요.


물론 우리는 타자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증오와 혐오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정치적 부족주의>의 저자인 에이미 추아에 따르면, 다른 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강렬함은 인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우리 몸에 새겨진 강력한 메커니즘입니다. (책 정보) 아마 스토아 철학자들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이러한 차이점보다 공통점에서 주목하여 “사랑의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내게는 고귀한 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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