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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Feb 02.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3-1

정의의 두 원칙, 그리고 대선 후보들!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얼마 전 경제 전문 유튜브 채널인 삼프로TV에, 대선 후보들과의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후보님들의 여러 가지 유익한 이야기들이 있었지요. 특히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가 강조하는 정의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35654

말 나온 김에, 정의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여의 원칙과 필요의 원칙, 이 둘은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정치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고려하는 중요한 두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여의 원칙은 어떤 재화를 분배할 때, 그 분배는 우리가 그 일에 기여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 공정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데이비드 흄이나 애덤 스미스 등을 통해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필요의 원칙은, 무언가 정의롭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에 관련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에 의해 태동되었고,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정의의 핵심 가치로 부상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는 이 원칙들이 정의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두 기둥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태동하고 발전한 맥락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심지어 이 둘은 때때로 충돌합니다. 그리고 이런 충돌은 21세기를 살면서 정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집니다. 기여의 원칙과 필요의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민초!민초!민초!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민트 초코를 좋아하는 사람 정상. 민트 초코를 싫어하는 사람 정상. 그런데 상대방을 무시하고 욕하는 사람 비정상. 이런 유머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제가 확신하는 유일한 것은, 기여의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든 필요의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든 모두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마치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을 흔히 발견합니다만..) 이 둘을 현실 내에서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우리 사회에 문화처럼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여의 원칙에 대해서 몇 마디만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는 정의의 목표가 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럽 왕자가 누리는 삶은 이제 근검절약하는 농민의 삶보다 그다지 더 편하지 않다. 농민들의 삶도 이젠 아프리카의 왕들보다 더 안락하게 되었다.” (국부론

이러한 변화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분업”의 발전이었죠. 자연스럽게 사회적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것과 관련된 “정의”의 문제가 특히 서로 간의 협력과 관련된다는 아이디어가 구체화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협력을 유지하고 촉진시킬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여의 원칙이라는 생각이 부상합니다. 사람들이 일한 만큼 자신의 몫을 가져갈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협력이 잘 유지되고 촉진되리라 본 것이죠.


그러나 도대체 누가 얼마만큼 기여했으며 어느 정도의 몫을 가져가야 알맞을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나 성공을 거뒀던 모델을 하나 꼽으라면, “자유로운 경쟁”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스펜서는 이러한 기여의 원칙이 가장 잘 균형 잡힌 상태로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구성원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에 개입하거나 거부할 자유를 폭넓게 누리는 사회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가장 잘 아는 것도 나이고, 나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적절한 균형이 자연스럽게 모색된다는 생각이죠. 이러한 모델 하에서 생각해보면, 기여의 원칙을 적절하게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히 기여의 정도를 나누고 분배하는 적극적인 개입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라는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규제를 줄이고, 대신 독과점이나 불공정한 플레이어들을 견제하거나 처벌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후보의 정의관은 이런 기여의 원칙과 자유로운 경쟁을 강조하는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정의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기본적인 틀부터 딴지를 거는 일련의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흄이나 애덤 스미스 바로 다음 세대에 활동했던 임마누엘 칸트가 대표적이죠. 만약 무언가가 사회적 행복이라는 결과 때문에 정의로운 것이라면, 이것은 정의가 결과에 의존적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칸트는 이러한 결과주의를 비판합니다. 무언가가 정의롭다는 것은 원래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인 것이지, 어떤 결과나 다른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칸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정의롭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결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줄 것은 지켜주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의에 있어서 제일의 문제는 자유와 평등 등으로 대표되는 기초적인 필요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필요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절한 필요가 무엇인지 또 필요를 보장해주는 방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에는 정말 다양한 대답들이 있습니다. 존 롤즈의 무지의 베일 등이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롤즈의 정의론은 기여의 원칙과 필요의 원칙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다른 종류의 대답들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며 기본소득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재명 후보의 주장은 필요의 원칙과 맞닿아 있어 보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필요의 원칙과 기여의 원칙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여의 원칙은 불평등을 심화하여 기초적 필요를 위협할 수 있고, 필요의 원칙은 사회적 협력 안에서 결국 아무런 기여도 없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무언가를 국가가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흐르니까요. 둘이 아무리 잘 조화를 이룬다고 해도, 필요의 원칙과 기여의 원칙 중에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에 이르면 쉽게 화해하기 어려워 보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굴레입니다. 그렇다고 이 둘 사이의 조화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주 좋은 대답을 당장 얻을 수 없더라도, 두 가지 원칙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 정의와 공정에 대해 고민한다면, 우리는 보다 더 날카롭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의 답을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장 할 수도 있는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정의관"이 헛소리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균형을 찾아가야 할 소중한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책을 추천합니다! 


참고 문헌: 데이비드 존스턴, 정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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