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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Feb 08.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4-1

 우리는 아직도 자율성이 뭔지 잘 모른다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제가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인 슈카월드를 통해서 재밌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영국에서 시행된 국가별 설문조사인데, 여러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이 압도적인 1등을 달리는 부문이 또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갈등”입니다.   


슈카님이 소개해주고 있는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 중 정치, 종교, 성별, 세대, 경제 등등의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비율이 다른 여러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높았습니다. 저로서는 신기한 결과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최근 몇 년 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갈등들을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갈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갈등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건강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갈등 자체가 좋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갈등은 에너지를 소비시키며 우리의 이목을 특정한 곳으로 이끌어 집중을 방해하니까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갈등의 양태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갈등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두 친구가 백신 접종 정책에 대하여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해봅시다. 이를테면 민수는 백신 접종에 반대하고, 영희는 백신 접종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로 대화를 하다 보면 말문이 막힐 때도 있지만, 금세 다른 좋은 이유를 찾아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줄도 압니다. 그런데 민수와 영희는 딱 한 가지 차이를 가지고 있어요. 누군지 말은 안 하겠지만, 한 명은 이 대화를 통해 더 좋은 이유를 발견하면 자신의 의견을 바꿀 의향이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결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으며, 오직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한 명은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의 자율성의 질은 달라 보입니다.  

    

사실 자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계에서 매우 자주 다루어져 왔던 문제입니다. 자율성은 행위자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지배력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선 항상 논란이 계속되어왔지요. (아마 정답은 없을 겁니다. 설득력 있는 여러 수준의 모델들이 제시되고 경쟁하는 양상이 계속되겠지요. 오히려 좋아!)     


첫 번째 대답은 아마 이런 할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는데 외부의 방해물이 없으면, 그게 자율적인 것 아닌가? 이를테면 내가 침대에 누워있고 싶을 때,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방해하는 외부의 장애물이 없다면, ‘시체놀이’라는 내 선택은 충분히 자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내가 누워있는 이유가 심각한 우울증이나 광장 공포증 때문이라면 어떨까요?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 중 무언가가 어떤 선택의 장애가 된다면, 이것은 자율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 때문에 철학자들은 ‘진정한’ 자율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습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 중에서 무엇이 정말 나의 선택의 통제력을 설명하는데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이런 고민에 초대합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마이클 브레트먼(Michael Bratman)은 자율성의 핵심이 되는 것은 ‘자기 지배 정책’(self-governing policy)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치 CEO가 기업을 운영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듯,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발휘하는데 기초가 되는 정책을 가질 수 있습니다. CEO가 그때그때 떠오르는 자신의 욕구에 사로 잡혀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욕구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듯이, 브레이트먼은 우리가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를 진정한 자율성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자기 지배 정책은 우리의 욕구들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겠죠. 이 자기 지배 정책에 따라서 우리들의 욕구는 나름대로의 순서를 가지게 됩니다. 일종의 체계가 만들어지는 거죠. 단순히 어떤 욕구나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기 지배 정책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자율적이라고 브레트먼은 주장합니다. 어떤가요? 꽤나 그럴싸하지 않나요?     


그런데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안드레아 웨스트런드(Andrea Westlund)는 이런 브레이트먼의 생각에 의문을 던집니다. 의문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자기 지배 정책’에 사로 잡히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죠. 브레이트먼이 욕구에 사로 잡히는 것이 진정한 자율성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웨스트런드는 자기 지배 정책에 사로 잡히는 것도 진정한 자율성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극단주의 이슬람 집단인 탈레반을 지지하는 여성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여성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신의 자유를 거의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브레이트먼은 만약 이 여성이 자신의 이런 처지를 탈레반식의 이슬람 율법을 최우선으로 두는 ‘자기 지배 정책’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자율적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웨스트런드는 그녀가 정말 자율적으로 탈레반식 율법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 아니면 광신적 신념에 사로잡힌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웨스트런드는 만약 우리가 자율성의 기준을 오직 행위자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항상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눈은 스스로의 눈을 볼 수 없듯이, 나의 반성 능력만으로는 나의 ‘반성 능력’ 자체나, ‘자기 지배 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살펴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반성 능력이나 자기 지배 정책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웨스트런드는 우리가 스스로의 자율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관계적 전환(relational turn)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나의 반성 능력이나 자기 지배 능력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타자’의 시선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어에 입각하여 웨스트런드는 대화하고자 하는 기질(answerability)이 자율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아이디어에 따르면, 나의 선택에 대하여, 나의 선택의 이유를 충분히 타자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나는 자율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에 참여하고자 하는 기질은 나의 선택과 선택의 이유들을 타자의 시선에서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의 선택이나 선택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논증입니다. 탈레반 여성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만약 이 여성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타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아무리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자율적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반면, 만약 그녀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의지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그녀가 자율적이라고 볼 근거를 잃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웨스트런드의 주장에 당장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웨스트런드는 대화에 참여하고자 하는 기질이 우리가 특정한 선택이나 사유 방식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전제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백신 사례로 돌아가 봅시다. 민수와 영희는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바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의향도 가지고 있고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중 한 명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진정으로 자율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런 경우는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기질이 자율성을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브레이트먼의 자기 지배 정책과, 이를 보충하고자 하는 웨스트런드의 관계적 전환을 간략히 조명해보았죠. 그렇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해선 다음 주에 추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Bratman, Michael E. (2004). Three Theories of Self-Governance. Philosophical Topics 32 (1/2):21-46.

Westlund, Andrea C. (2009). Rethinking Relational Autonomy. Hypatia 24 (4):26-49.

Stoljar, Natalie, "Feminist Perspectives on Autonom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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