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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Feb 22.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6

자유의지와 결정론 사이의 갈등!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1. 결정론이 참이라면?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다소 낡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고, 뇌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혀 자유롭지 않아 보이는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이제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마치 당구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당구공처럼 생각하는 것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이지요. 이 생각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입니다.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구! 

 

먼저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진 리벳 실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리벳 실험은 1983년, 즉 무려 40년 전에 행해졌던 실험으로서,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리벳은 실험자의 머리 위에 두뇌활동을 측정하는 기계를 씌웁니다. 실험자 앞에는 버튼이 놓여있고, 실험자는 그녀가 원할 때 언제든 그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해놨지요. 그런데 실험 결과에 따르면, 실험자의 뇌는 자신이 그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의식적으로) 마음먹기 이전에 작동합니다(!?)


이 실험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의식 차원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진 선택을 의식이 반영할 따름이다! 즉 우리는 결코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 "선택 해야지"라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선택은 이미 나의 의식적인 의지와 관련 없이 이루어져 있다!  


이 실험의 신뢰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있지만, 오늘은 일단 이 실험의 결과와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해봅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그 선택은 우리의 의식적인 의지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앞서서 작동하는 뇌의 활동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뇌는 여러 신경다발로 이루어져 있고 이 신경다발들은 전기신호들을 주고받으면서 작동합니다. 우리는 뇌와 뇌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고,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앎은 아직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축적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뇌는 물리적인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것들은 마치 행성들이 태양계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며, 당구공이 당구대 안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충분히 큰 물리 세계 안에선,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지요. 또 충분한 정보가 있다면, 우리는 원인을 알 때 그 결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의 작동도 이런 간단한 규칙으로부터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인간도 결국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결정론적 세계 안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결정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결정론은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를 암시합니다. 만약 결정론이 참이라면, 우리는 자유의지를 포기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심지어 만약 결정론이 참이라면, 자유의지만 부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여러 개념들이 다 같이 위기에 처합니다. 만약 우리가 전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가 내린 선택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우리가 전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의 인간다움(!)은 도대체 어디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인가?  

 

2. 사실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결정론을 지지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반박할 것입니다. 철학자들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정론을 지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결정론을 반박합니다. 조금 다른 점이라고는, 밥 먹고 하는 일이 생각하는 것이라,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양하게 접근한다는 점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철학자들의 노력은, 생각보다, 재밌는 아이디어들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상황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철학자들이 놓여있는 상황을 좀 과장해서 제시해보고 싶습니다. 철학자들은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에게 도덕 체계도, 인간다움의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지키는 것은 체스판에서 나머지 말들이 킹을 지키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의지 개념이 무너지면, 윤리와 철학이라는 게임 자체가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 이런 서술이 과장이라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실제로는 훨씬 미묘한 논의들이 진행되기 때문에..) 


한편으로 결정론은 너무 강력해 보입니다. 결정론은 마치 상대편의 퀸과 같습니다. 전장을 휩쓸며 철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서 체스 메이트를 외치고 있지요.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 상황입니다.  결정론이라는 위기 앞에서 철학자들은 자유의지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켜낼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으악!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당장 생각해볼 수 있는 전략은 결정론이 거짓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퀸이 날뛰는 것을 멈추는 방법은 퀸을 잡아버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20세기 양자역학이 발전하면서 어쩌면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기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끝장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세계는 확률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활동하는 거시세계 내에서 결정론적 규칙들은 여전히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양자역학이 발전하는 것과 (순수한) 자유의지를 지켜내는 것 사이에는 큰 연관이 없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다음 링크로!)

 

또 다른 전략이 없을까? 지금 하고 있는 판을 포기해버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게임처럼 보인다면, 빨리 포기하고, "한 판 더!"를 외치는 것이 깔끔할 때가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철학자들도 비슷한 전략을 취합니다. 사실 이 전략이야 말로, 현대 자유의지 논쟁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을 되짚어봅시다.  

(1) 만약 결정론이 참이라면, ‘자유의지’는 없을 것이다.  

(2)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덕적 책임도, 인간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역시 핵심이 되는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자유의지란 무슨 의미인가? 철학자들은 이 자유의지의 의미에 대해서 먼저 되짚어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결정론이 자유의지와 양립할 수 없는 게 맞나? 사실 결정론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적 책임도, 존재의 의미도 심각하게 위협받을 이유가 사라질 것입니다. 즉 철학자들은 자유의지의 의미를 수정하여 이 문제에 대응하고자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실 리벳 실험이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리벳 실험이 부정하는 것은 매우 순수하고 엄격한 의미의 자유의지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뇌라고 하는 물리적 기반에 독립하거나, 최소한 물리적 기반에 앞서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육체에 분리되어서 혼자 둥둥 떠다니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자유의지는 이런 순수하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순수하고 독립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의지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가 없어도, 도덕적 책임과 인간의 의미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철학자들은 결정론이 자유의지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결정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자유의지는 많은 수의 철학자들에게 어차피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3.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있다  


이제 철학자들의 모험은 결정론이 참이냐 아니냐 이런 문제와 큰 관련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나아가 리벳 실험이 참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결정론과 양립 가능한 자유의미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됩니다. 결정론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도덕적 책임과 인간의 의미를 단단하게 붙잡아줄 수 있는, 그런 자유의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의지가 어떻게 가능할까?  


먼저 이런 자유의지는 뇌의 활동이나 무의식의 결과여도 상관없습니다. 나아가 문화나 역사 그리고 사회적 구조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지요. 철학자들은 인간이 선택 능력이 의식 외의 요소들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철학자들이 묻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선택을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 방식이 바뀌었다는 데 주목할만합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자유로운가 아닌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인간이 자유롭다면, 왜 자유로운가를 묻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논점을 선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논점의 선취라기보다 논의의 맥락을 바꿔버린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전까지의 논의가 결정론이 참이냐 아니냐라는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작동했다면, 새로운 논의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정론이 참이든 아니든, 우리가 실제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서, 내일 아침에 일제히 모든 뉴스와 신문에서 사실 결정론이 참이었다는 발표가 보도된다고 해봅시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나서서 결정론이 참이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발견되었음을 아주 잘 설명한다고 해봅시다. 그럼 어떻게 될까? 예측하기 어려운 혼란이 생겨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무언가를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그 느낌마저 일순간에 사라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공부를 할지, 어떤 투자를 할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사회와 문화의 맥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무언가를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낍니다. 도대체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들은 이제 형이상학적 문제를 치워두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자유의지에 있어서의 “양립가능론”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것은 무언가 철학자만의 대단한 시각의 변화는 아닙니다. 혹시 인터넷이나 일상 생활 속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거나 논의를 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생생하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언뜻 봐서는 그들의 논의가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의지가 불가능한 것이면서, 생생한 것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어 보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철학자들의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두 입장이 전개되는 층위가 다소 다를 뿐입니다. 한쪽은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체험의 영역에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거나,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고 있을 따름이지요. 철학자들이 사회에 할 수 있는 기여가 있다면, 이처럼 논의 자체를 분석해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그나마 명백한 형태로 드러내는 것일 것입니다. 


참고 문헌 

O'Connor, Timothy and Christopher Franklin, "Free Will",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Talbert, Matthew, "Moral Responsibilit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Baggini, Julian (2015). Freedom Regained: The Possibility of Fre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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