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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이야기 Mar 02. 2022

철학이야기 주간 뉴스레터 #7-1

진정한 자유의 문제는 욕망에 있다고!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스터디우스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 양립가능론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양립가능론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의지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신체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 역사 등의 외부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신비로운 선택능력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결정론이 참이냐 아니냐는 더 이상 많은 철학자들에게 흥미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그러면서 이제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문제는, 도대체 우리의 어떤 능력이 자유를 구성하느냐와 관련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아직 무언가 중요한 것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양립가능론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는 무슨 뜻이란 말인가? 만약 결정론이 옳다면, 도대체 어떤 특징이 인간의 선택을 자유롭다고 설명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특징은 나아가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인간다움을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앞서서, 철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이유가 단지 인간의 선택 능력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무슨 대답을 내놓고 있을까요? 정말 다양한 대답들이 제시되었지만, 오늘은 이와 긴밀하게 연관된 3명의 철학자들의 생각을 간략히 소개해볼 계획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자유의지는 특정한 능력에 관련된 논의이고,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능력 중에 무엇이 자유의지라고 불릴만한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해리 프랑크퍼트(Harry Frankfurt)는 특히 욕망의 질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그는 먼저 우리의 욕망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1차 욕망이고 또 다른 하나는 2차 욕망입니다. 1차 욕망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하는 것으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배고플 때 식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며,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요. 프랭크퍼트가 들고 있는 구체적인 예시에서는,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 욕망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러한 욕망은 온전히 우리의 통제 하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 생물학적 조건들과 환경들에 의해서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원합니다. 그런데 프랭크퍼트는 우리 인간이 가지는 욕망은 이런 1차적인 것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이런 1차적 욕망에 대한 욕망, 즉 2차 욕망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vecteezy.com/free-photos


2차 욕망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여기 어떤 흡연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흡연자는 니코틴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1차적인 욕망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 흡연자는 동시에 금연을 희망하기도 합니다. 금연을 희망할 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흡연에 대한 욕구를 가지지 않기를 욕망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금연이라는 행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1차적인 욕망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것이지요! 즉 1차 욕망을 대상으로 하는 욕망, 멋들어지게 말해서, 2차 욕망(second-order desir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처럼 1차 욕망을 대상으로 삼아, 이 욕망을 강화하거나 약화하거나 혹은 그 방향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2차 욕망을 가집니다. 


나아가 프랭크퍼트는 이러한 2차적 욕구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인간(person)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고 주장합니다. 1차적 욕구에 따라 본능적이고 충동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1차적 욕구를 컨트롤하고자 하는 의지를 2차적 욕구로서 가질 수 있음이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만약 모종의 이유로 인간이 2차적 욕구를 가질 능력을 상실하거나, 2차적 욕구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1차적 욕구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할 때 그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경우, 인간은 인간다움을 상실한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프랭크퍼트의 설명에 있어서 결정론이 참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님에 주목합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우리의 계층적 심리적 구조입니다. 인간의 욕구가 결정론적 세계 안에서, 엄격한 인과관계든 무의식이나 환경 등의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해 발휘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프랭크퍼트가 말하는 자유의지를 훼손하진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의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1차 욕구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욕구에 대한 욕구, 즉 2차 욕구를 가질 수 있느냐, 그리고 이에 맞추어 1차 욕구를 조정할 수 있느냐의 여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요? 1차 욕구에 따르는 것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지만, 2차 욕구에 따르는 것은 자유롭다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1차 욕구에 본능적이고 충동적으로 이끌리는 것처럼, 2차 욕구에 본능적이고 충동적으로 이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2차 욕구를 따라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일까? 프랭크퍼트는 2차 욕구를 의지(volition)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지만, 결국 욕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어떤 오컬트 종교에 심취한 청년이 하나 있다고 해봅시다. 그는 오컬트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를 악마에게 희생제물로 바치고 싶어 합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청년의 경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싶다는 1차적 욕구와 그 욕구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싶다는 2차적 욕구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컬트 종교에 빠져서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하는 이 청년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제시 한 프랭크퍼트의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고 해야 할 테지만, 개리 왓슨(Gary Watson)은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오히려 이러한 청년을 광신적 믿음에 사로 잡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왓슨은 1차적 욕구에 대한 2차적 욕구를 가지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욕구를 컨트롤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어떤 반성을 할 수 없다면, 위에서 본 오컬트 청년의 예시처럼, 전혀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배제하기 위해서 왓슨은 추가적인 조건을 도입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1차적 욕구를 컨트롤하는 2차적 욕구를 발휘할 때, 그 욕구를 발휘하는 적절한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왓슨에 따르면 욕구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욕구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 체계에 따라서 이성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어떤 욕구를 가져야 적절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에 따라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우리의 의지는 자유롭습니다. 프랭크퍼트가 욕망들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면, 왓슨은 그 욕망들의 방향을 설정하는 또 다른 능력, 즉 이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왓슨의 제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욕구의 방향성을 고려하는 어떤 지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 방향성의 적절함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욕구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욕구에 대해 이성적으로 반성한 다고 할지라도, 그 반성이 무언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지 않을까? 수잔 울프(Susan Wolf)는 이러한 우려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시를 제시합니다. 


여기 독재자 조조가 있다고 해보자. 조조(Jojo)는 아주 잔인한 사디스트 독재자 조(Jo)의 아들이다. 조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과 같은 잔인한 사디스트 독재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폭군이 되기 위한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조조는 자신의 아버지 조와 마찬가지로 잔인하고 사디스트적인 인간으로 자란다. 조가 죽은 후 조조는 자신의 아버지에 따라 독재자가 된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문하고자 하는 1차적 욕구를 가지며, 이 욕구를 유지하고  강화하고자 하는 2차적 욕구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자신의 가치 체계에 따라 자신의 욕구가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프랭크퍼트와 왓슨의 기준에 따르면, 조조는 분명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울프가 볼 때,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 히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언가 제대로 판단할 능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즉 그는 자신의 이성을 발휘할 때, 외부의 객관적인 기준을 참고할 능력을 획득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잔인한 사디스트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 서 전적으로 책임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전적으로 자유롭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수잔 울프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를 조절할 때, 그 방향성의 적절함을 결정해줄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자유의 기준’이 없다면, 인간의 선택은 결국 임의적이고 우연한 선택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성적 이유의 적절함을 무언가 보증해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결국 임의적이고 우연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프랭크퍼트가 욕구들의 관계에 주목하고, 왓슨이 욕구들을 평가하는 이성에 주목하고 있다면, 울프는 이성의 방향성을 평가하는 외부의 기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수잔 울프는 외부의 기준을 내재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의지에 있어서 핵심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결정론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인간의 능력이 인간의 책임과 인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프랭크퍼트의 주장에 더 동의를 하면서 수잔 울프의 주장이 너무 엄격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수잔 울프의 주장에 더 동의하면서 프랭크퍼트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둘 다 마음에 안 든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여기서 어떤 입장 하나를 지지하진 않을 것입니다. 대신 나는 자유의지의 논의가 더 이상 결정론이냐 아니냐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이고 윤리학적인 문제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참고 문헌

Talbert, Matthew, "Moral Responsibilit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Wolf, Susan, 1987, "Sanity and the Metaphysics of Responsibility”, in Schoeman 1987: 4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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