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하나, 오뎅 하나, 계란 한 개
어릴 적 먹던 추억의 음식
떡볶이를 처음 돈을 주고 사 먹었던 곳은 국민학교 1학년 하굣길 학교 앞 분식점이다. 백 원짜리 하나를 들고서 '오늘은 떡을 먹을까 오뎅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교문으로 향했다. 정문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있는 젊은 아줌마네 분식점에는 조금 작은 크기이긴 했지만 떡 하나 어묵 하나 당면 사리 조금 해서 백 원이었다. 후문 가까이 함께 살던 단짝과 함께 그 떡볶이를 먹으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갔다가 떡볶이를 먹고 다시 운동장을 지나 후문으로 갔다.
1학년이 되고서 동네 상가의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학원에 가기 전 조금의 용돈을 받기도 했는데, 그런 날에는 학원 바로 앞 참기름집에서 파는 떡볶이를 먹곤 했다. 그 집도 떡 하나 백 원, 어묵 하나 백 원, 삶은 달걀은 하나 이백 원이었다. 떡은 나무젓가락 절반보다 조금 큰 가래떡이었고, 어묵은 요즘 스마트폰을 세로로 자른 정도의 길이에 두툼한 것이었다.
떡이나 어묵을 하나씩만 사면 먹기 편하게 나무젓가락에 끼워 주셨다. 삶은 달걀을 함께 사면 오목한 그릇에 국물을 넉넉히 담아 주셨다. 달걀노른자가 으깨어진 떡볶이 국물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특히 이 떡볶이집의 떡은 겉면이 달콤해서 참 좋았다. 또 저학년 아이들이 가면 매워할까 봐 겉에 묻은 고춧가루를 살짝 훑어서 주셨다. 비가 오는 날에 내 주머니 속에 이백 원이 있으면 삶은 달걀을 사서 뜨끈한 국물만 먹기도 했다.
친구들은 초등학교 시절 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종이컵에 담아 팔던 컵 떡볶이인데, 나는 한 개 백 원에 팔던 그 떡볶이이다. 꽤 오랫동안 우리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는 한 개에 백 원씩 팔았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도 학교 앞 분식집에서는 여전히 떡 하나 어묵 하나 백 원 씩에 팔았다. 컵떡볶이는 고등학교 가서 처음 봤다.
4학년 때 친구들과 자주 가던 작은 분식집이 있었다. 아주머니 두 분이 함께 하시는 곳이었는데 우리가 더 좋아하는 푸근한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분이 계실 때는 떡 하나 어묵 하나 시키고, 옆에서 파는 어묵 국물에 튀김 하나씩 먹고 있으면 사람들이 없을 때 떡볶이를 섞다가 쪼개진 떡이나 어묵을 접시에 얹어 주시기도 했다. 바로 옆에 더 크고 튀김 종류도 다양하게 파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항상 그 작은 곳으로 갔다.
처음 임신을 했을 때 진해에 살았는데, 입덧이 워낙 심했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좋아하던 떡볶이는 생각만 해도 토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옛날 그 분식점들이 그리워서 남편을 졸라 옛날 그 좁은 동네길로 드라이브를 나간 적이 있다. 다른 떡볶이 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피아노 학원 옆 참기름집은 가게도 그대로였고, 입구에 떡볶이며 순대며 어묵 화구도 남아 있었다. 이른 시간에 갔었어서 문은 닫혀 있어 여전히 그분이 장사를 하고 계신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매워할까 봐 양념을 걷어 주시던, 비 오는 날 삶은 달걀 하나만 사 가던 일학년 여자아이에게 추운데 속 뜨끈하게 잘 먹어라 하시던 떡볶이집 아주머니는 이제 떡볶이집 할머니가 되셨을까? 그 떡볶이는 여전히 한 개에 백 원일까? 그 집 떡볶이의 떡은 여전히 달콤할까?
한 개에 백 원, 한 컵에 오백 원 하던 떡볶이는 어느새, 1인분에 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오백 원 동전 하나만 달랑 들고 가도 떡과 어묵과 삶은 달걀을 먹을 수 있던 학교 앞 떡볶이집도 이젠 보기 힘들어졌다. 많이 맵지 않고, 적당히 달콤하던 그 시절의 떡볶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