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에 익은 담쟁이 잎사귀

by 글열음

어느 집 흙벽 담에는 붉게 물든 담쟁이가 엉켜 있었다. 덩굴은 벽을 타고 담 꼭대기에 얹힌 기왓장까지 올라가 수북하게 자리 잡았다. 어느새 초록에서 붉은색으로 바뀐 잎사귀는 이 즈음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순한 바람에도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쉼 없이 흐르는 시간에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해 보였다.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해진다. 그런 모습에도 아량곳 하지 않는 초침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 말없이 째깍째깍 흘러간다. 이런 현실 앞에서 내 눈앞에 펼쳐진 담쟁이덩굴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치명적 시간의 옷을 입은 듯 붉게 물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록색이었던 그 덩굴은 담 너머 낭떠러지가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뻗어 나갔다. 담 꼭대기에 오른 덩굴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목표치에 다다랐음에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문득 정상화 시인이 쓴 '담쟁이' "이젠 멈추거라/저 너머엔 절벽이다/ 바닥부터 한 땀 한 땀 디딜 틈 없었어도/스스로 촉수 녹여 붙인 고통으로" 란 시가 떠오른다. 절벽인 줄도 모르고 한 발 한 발을 짚고 오른 덩굴은 낭떠러지 끝에서 갈 길을 잃은 듯, 허우적이며 헤맨다. 담 넘어 미지로 뛰어든 그 정신을 우리는 '용기'라 부를까, 아니면 목숨을 건 '무모함'이라 해야 할까. 그것이 용기였는지 무모함이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내 앞의 가느다란 덩굴은 붉게 물든 잎사귀들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오래 전도 아닌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초록이 무성한 틈새에서 매미가 목 놓아 울어대던 때가 있었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려 뜨거운 열기로 온 대지를 데우던 계절. 그때의 폭염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맹렬했고, 마음과 몸을 지치게 하던 더위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 사라져 버렸다. 그즈음 초록 담쟁이덩굴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난여름 갑자기 쏟아지던 소나기 속에서도 담쟁이잎은 온몸을 적시고도 더 빛났다. 그렇게 싱싱하던 초록빛 덩굴이 이제는 시간의 뒤안길로 멀어져,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해진다.


문득 몇 해 전 이맘때쯤 종로구 홍파동에 위치한 홍난파 가옥을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이미 늦가을에 접어든 그날, 담쟁이는 가옥의 벽을 잡고 촘촘하게 천을 짜듯 얽혀있었다. 바람에 스치는 마른 잎은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사이로 붉게 빛나는 잎사귀들은 유난히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날, 동요 <봉선화> 동요가 떠올랐다. 담쟁이덩굴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 듯, 검 붉게 멍든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해 질 녘 가옥 벽에 매달린 붉은 잎을 보는 순간, 나는 태양신 '아폴론'(Apollōn)을 떠 올렸다. 해는 서쪽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 때 잠시 스치는 강한 빛줄기는 잎사귀 위로 광채처럼 퍼지고, 그때의 잎사귀는 작은 떨림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어릴 때 살던 시골집 대문입구 흙벽에도 담쟁이덩굴이 있었다. 그때는 담쟁이덩굴에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흙담 위의 담쟁이가 떠오른다. 여름이면 무성한 초록이 담전체를 물감을 칠하듯 뒤덮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붉은 물감을 푼 듯한 덩굴 속 유독 붉게 물든 잎사귀 하나가 매달린 모습을 보았다. 마치 붉은 물감으로 '툭' 찍어 놓은 듯했지만 그때 나는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다.


추위가 시작될 즈음 무성했던 붉은 잎은 어느새 거의 떨어지고 한두 잎만 힘겹게 남아 있었다. 담쟁이덩굴은 자신이 지나온 계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불게 변해 마른 줄기는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 있었고 그 모습은 오히려 벽이 질식할 듯해 보여 가슴이 멍해졌다. 계절을 버텨내며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의 역사가 그 속에 새겨져 있었다.


어느 기와집 흙담벽에서도, 홍난파가옥 옛집에서도, 어린 날의 흙담에서도 보았던 담쟁이는 사실 그곳뿐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퇴근길, 담쟁이덩글이 낭떠러지 끝에서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 담쟁이는 태양을 닮은 듯 붉다. 그 순간, 한 해의 끝자락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게 된다. 추위의 문이 열리는 12월 담쟁이덩굴은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서 상징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한 잎, 두 잎 떨어진 덩굴은 마치 붉은 혈관처럼 드러나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생존의 방법을 찾는 듯 보인다.


서서히 몸속 수분을 말려내는 겨울준비를 단단히 하듯, 바짝 마른 줄기는 봄이 오면 다시 물기를 끌어올려 연초록 잎을 틔우기 위한 긴 생존의 끈을 엮는다. 담쟁이덩굴은 그렇게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겨울 준비가 무엇인지 조용히 가르쳐 주고 있었다. 겨울 추위 이겨내기..... 새로운 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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