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3장 - 인간 판단의 척도가 되는 노동
일하지 않으며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부여되었던 광기의 기호.
그리고 일하지 않는 자를 인간 본질의 결여가 있는 자로 보는 시각은 아직도 건재하다.
‘무직자’ 혹은 ‘실직자’ 자신이 느끼는 좌절감과 수치심. 소위 ‘백수’라는 멸칭.
전후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장기간 ‘무직자’로 있는 사람을 보면서, 그 자신이 그 문제를 초래했으며 극복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는 타인들의 짐작.
그러한 감정은 무직자 자신이나 가족, 지인들의 감정, 사적인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력서에 피면접자의 연대기에서 비워진 몇 년은, 면접자로 하여금 편집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정신의학의 전문가들도, ‘직업에 적응하는 것’을, 정신과 질환의 유무를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정신과적 질병을 진단 분류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쓰이는 DSM 진단기준에서는, 그 병이 우울증이던, 공황장애건, 조현병이건, 중독이건, 항목별로 다양한 증상들을 배열한 후, 다음과 같은 추가 항목을 제시한다.
‘이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기능 장애를 초래한다.’
이 항목은, 어떤 증상을 '비정상' 혹은 '질병'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 불문율처럼 사용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환자가 자신의 증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치료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 항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진단에 대한 의견 차이, 치료를 설득하거나 강요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이 항목이 객관적 증거로 사용된다.
정신과에는 다른 의학 분야와 달리, 자신의 병과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들이 있다. 자신의 정신적 질병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정신과에서는 ‘병식(insight)’이라고 하며, 자신의 질병을 부정할 때, 병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정의한다. ‘병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고혈압을 진단 받았지만 저염식은 거부하거나, 암진단을 받았지만 수술은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병식이 없다’는 것은,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은 최소한 그 문제에 있어서는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환자가 '자신은 병이 없다'고 주장할때, '당신에게는 병이 있다'고 하면서 치료 받도록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문제다. 왜냐면 정신과적 질병은 대부분, 의사의 주관적 경험에 기반한 진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환청과 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다면, 정신과 의사는 그 환자를 조현병으로 확진하게 되는데, 가족이나 환자가 이 점을 부정하면서, 그가 조현병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하면 난감하다. 피검사나, 뇌MRI 를 촬영한다고 해서, 조현병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이런 종류의 논쟁은 발생하지 않는데, 만성적인 환청과 망상은 환자와 가족들을 무척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흔하게 병식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는 분야는 바로 ‘중독’인데,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포함해서, ‘그 정도는 병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치료자와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렇게 치료에 저항하는 환자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치료자가 가장 자신있게 아무개님께서 중독성 질환을 앓고 있으니 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증거는, ‘금단’이나 ‘내성’ 보다도, 바로 ‘몇년 째 아무 일도 안하고 집에서 술만 마시고 있다’라는 지적이다. 이 점을 지적하면 환자 자신도 입을 다물고, 가족들도 치료 필요성에 쉽게 동의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와 똑같은 양의 술을 매일 마시고 있으며, 연휴 기간이나 치과 치료 후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식은 땀을 흘리는 등의 심한 금단증상을 겪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매일 아침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일정을 유지하고 있다면, 의사나 가족들이 그에게 치료를 받아라, 술을 끊어라 주장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4~5년 동안 매일 밤 소주 2병이나 맥주 2000cc 를 마시고 있지만, 매일 직장에 출근하고 있다면 알콜 의존이 아니라고 보는 의사도 많다. 이 문장을 보는 여러 사람들도 이런 사람이 알콜중독인가 아닌가 애매할 것이다. 많은 알콜 중독 환자들은, 술을 마시는 양이 문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주사나, 주취 행동 문제가 알콜 중독의 진단 기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다면 4~5년 전부터 매일 소주를 2병씩 마시기는 하는데, 직업이 가정 주부라면 어떨까? 가정 주부가 낮에는 집안일을 모두 착실히 수행하고, 아이 학교 보내고, 밤에는 모든 가족들에게 저녁 식사 차려 먹인 후, 밤 12시가 되면 혼자 식탁에 앉아서 소주 2병 마시고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이것은 중독일까 아닐까?
혹은 그 가정주부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에 술을 마신다면 그것은 중독일까 아닐까?
이런 케이스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진단이 무척 애매하며, 전문가의 의견 및 환자나 가족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가정주부가 낮에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면서, 집안일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면?
이런 경우는 모두 고민 없이 알콜중독이 확실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비과학적이며 객관적이지 않은 판단 방식이다. 그것은 객관적 검증이 아니라, 통념적 사고 방식의 적용일 뿐이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알콜 중독이 아닌 편집증, 피해 망상 환자의 사례이다.
어떤 편집증에 걸린 사람이, 윗집에서 자신을 해치기 위한 독가스를 매일 살포하고, 매일 몰래 내 집에 들어와서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간다고 불평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병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의 가족, 이웃, 관리실 직원들, 신고 받고 온 경찰들까지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다. 그 때 자문을 의뢰받은 전문가가 그의 정신병을 진단하고, 필요하다면 가족에게 강제 입원 치료를 권할 수 있는 ‘용기’와 ‘근거’ 역시, 바로 ‘사회직업적 손상’이라는 항목에서 나온다.
저 사람은 그의 정신병적 증상들 때문에 오랫 동안 일하지 않고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본연의 인간적 존엄을 잃었으므로, 강제로라도 치료를 받도록 돕는 것이 그에게도 도움이 되며(그가 거부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런 피해망상에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매일 평일 아침에는 출근하여 저녁에는 들어오는, 소규모의 영업장이기는 하지만, 정직원으로서 10년 이상 일해오고 있다면? 그런 경우, 전문가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에게 강제 치료를 권하지 못할 것이다.
의학은 과학이고, 질병은 건강하지 않은 비정상적 상태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의 증상 외에, 근무 양식을 보고 진단이나 치료 방침이 바뀔 수 있을까?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판단 방식을 피할 수는 없다. 정신의 질병이란, 결국 자신이 보든, 타인이 보든 주관적으로 지각되는 증상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자연과학과 달리, 여러 인문과학이나 경제학 등의 연구와 이론들은, 최대한 객관적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연역적인 기본 명제와 주관적 경험의 총체이다. 통계학을 도입하여 가능한 주관을 배제하려고 해도, 결국은 주관이 개입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의 전문가들은,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부정하거나 치료를 거부할 때, 자신들 스스로도 혼란스러우며, 시대적, 통념적으로 사용되는 보편적인 명제를 차용할 수 밖에 없다. 그 명제는, ‘한 인간이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인간 자신의 가치를 잃었다’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