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사 초년생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생각했어.
정치를 좀 잘했으면 달라졌을까.
재계약했어도 어차피 1년 연장이야.
주제파악을 하고 나니 사는 게 좀 편안해졌다. ‘내공은 개뿔, 실상은 허당. 아닌 척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자, 괜히 나만 골병 든다’ 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니 힘든 일도 좀 덜 피곤해졌다.
그렇게 뾰족해졌던 마음이 무뎌지던 중 오랜만에 아이비에게서 톡이 왔다. ‘내일 점심 먹을까.’
좋아하는 사람이고 너무 오랜만이라 보고 싶었지만, 점심약속을 잡기 어려운 날이었다. ‘어쩐다. 내일 점심은 어려운데.’
긍정의 답을 못하는 대신 연락이 온 김에 새로 날짜를 잡아 만나고 싶었다. 캘린더를 들여다보며 내가 편한 날 몇 개를 주려고 하려던 찰나. ‘그럼 오늘 저녁은?’
원래 저녁 약속은 아이 때문에 잘 잡지 않는다. 남들은 목숨 건 듯 치열하게 싸우는 무림에서 늘 한발 물러선 마음으로 살 수 있었던 건 본래 내 성격이기도 하지만 내 아이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무림을 떠나기로 한 것도 내 시간과 노력을 아이에게 좀 더 들이고 싶은 욕심이 컸던 이유다.
그래도 오늘 저녁은 아이비를 만나고 싶었다. 급히 아이를 맡아줄 사람을 찾았다. 늘 바쁜 메이트가 흔쾌히 도움에 응해줬다. 늘 어려울 때마다 부탁을 많이 해 미안했던 그래니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었다.
허나 역시 너무 순조로운 것은 이상하다. 일이 더디 끝나며 출발이 늦어졌다. 아이비는 괜찮다며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나는 빨리 가서 만나고만 싶었다. 마음이 급할수록 차는 더 밀린다. 택시가 빨리 달리려 해도 앞차가 가로막고, 신호도 도와주지 않았다.
한 시간이나 아이비를 기다리게 해놓고서야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아이비는 미리 시켜놓은 안주거리와 술을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짤렸어. 당장 내일부터 안 나가도 돼. 재계약이 어렵다고 통보를 받았는데 남은 휴가 쓰면 그렇게 되더라고.”
담담히 말하는 아이비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그래도 좋은 곳에서 다시 일을 찾겠지 싶은 마음에 “그랬구나. 또 금방 좋은 데 갈 수 있을거야. 잠깐 숨 돌릴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거 같아”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아이비는 나보다 스펙도 좋고 다재다능해서 여러모로 활력이 느껴지는 호감형이다. 보란 듯이 이직을 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아이비가 어느 날 번아웃으로 일을 쉬기로 했다고 했을 때 다들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 시간이 꽤 길어지면서 나이 든 사람의 갭이어 혹은 재정비 기간이 의미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해야만 했다. 업의 전환이 쉽지도 않겠지만, 그동안 해온 일이 도둑질이라 좀처럼 예전 일에서 벗어난 이거다 싶은 새로운 일이 떠오르지도 않는 게 당연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서야 아이비는 새로운 자리에 서게 됐다. 그것도 딱 듣기만 해도 알만한 번듯한 곳이어서 다들 “역시 아이비 능력있어”라며 축하해줬다. 그렇게 기쁜 인사를 주고받은지 꼭 1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이비로부터 다시 일을 그만두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재계약 심사에서 별로 좋은 평가를 안 해준 모양이야. 내가 뭘 잘못했을까 생각했어. 그런데 특별한 건 없는 것 같구…. 정치를 좀 잘했으면 달라졌으려나.”
들어보니 어렵게 잡은 이 자리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리에 연연하는 박쥐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게 아이비답다 생각하고 “아니야. 잘했어. 잘한거야”라고 말해줬다. “그런 게 어울리지도 않지만, 그렇게 해서 자리보존을 했다 치더라도 어차피 1년 연장이잖아.”
그렇다. 아이비도 계약직이었다. 계약직에도 여러 레벨이 있어서 나와는 차원이 다른 계약직이지만 아이비도 계약직은 계약직이었다. 때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고, 계약연장에도 제한이 있다.
그 계약직 타이틀이 뭐라고 나보다 훨씬 대우받는 아이비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이 든 나는 지난 몇 개월간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내가 허우적거리며 실수한 나날들을 스스로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서로의 허물이 허물 같지 않고, 상대의 아픔이 내 아픔 같았던 그 밤, 우리는 서로를 달랬다. 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은 아니지만, 그의 아픔이 나에게 쓴 약이 됐다.
‘계약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인생의 배움이 또 찾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