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내가 나일 수 있어 그걸로 됐다

-나는 퇴사 초년생입니다

by 문성옥
확실해? 내기할까?
내가 맞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의 모든 촉수는 그의 기분을 살피느라 바빴다.
내가 나일 수 있어 그걸로 됐다.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계약 기간이 끝나갈수록 업무 여건이 전과 다르게 여유로워졌다.

그날그날 하루치 일을 받아서 일하는 나는 자료가 늦게 들어오면 퇴근이 늦을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오후 5시가 넘어 자료가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게 됐다. 몇 번 다뤄보며 익숙해진 내용의 자료들도 많아지면서 여유가 생기고 일이 쉬워졌다.


서두르지 않고, 허둥대지 않고 차근차근 일할 수 있는 날이 많아지니 실수도 줄었다. 때로는 자료도 줄어서 노동 강도가 나날이 주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수개월을 힘들어하면서 ‘계약 기간만 끝나봐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거다!’ 생각했던 이 사무실이 요 며칠 좀 편해지니까 슬슬 재계약이 하고 싶어졌다.


이제 정말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여가에는 내가 기대했던 내 삶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마다하고 새로운 일을 찾는 건 더 수고로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계약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계약만료는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인사 관련 업무를 하는 플라워와는 그동안 통 볼 일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면접날 한 번, 계약서 쓰는 날 또 한 번 본 것 외에는 복도에서 지나가다 마주친 적조차 없었다. 업무 성격이 전혀 다르니 일하는 공간이 다른 게 당연했다. 그런 플라워에게 불쑥 연락해 재계약 여부를 묻는 게 멋쩍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그동안 불호령이 떨어질까 무섭기만 하던 신령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바뀌어서 어리둥절했다. 하루에 두세 마디 겨우 하는 정도지만 장풍 같았던 신령의 기운이 봄바람 같이 살랑댄다 여겨질 정도였다.


그 신호탄은 신령이 퇴근하면서 내 등 뒤로 “요즘 잘 하고 있어!”라는 말을 툭 던진 날이었다. 너무 뜻밖이라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일까?’ 하며 내 귀를 의심했다. 업무가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실수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는데 그럴 때는 “내가 잘 보고 있나 체크하는건가?”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다리를 후들거리게 하던 신령이 편하게 대해주니 물론 좋기도 했지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의 농담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신령을 괜히 언짢게 하지는 않을까 겁도 났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갈 무렵 신령이 내가 보낸 파일을 열어놓고 나를 불렀다. “이게 맞나?”


나도 석연치 않아 몇 번이나 체크한 부분이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내가 확인한 바로는 맞았기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확실해? 그럼 우리 내기할까?”


너무 당혹스러운 반응에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내기하자는 신령에게 “다시 확인하겠습니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다른 참고자료까지 찾고 또 찾아봐도 내가 맞았다. 결국에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신령 앞으로 다가가 여차저차 설명하며 내가 틀리지 않음을 이야기했다.


“하하하, 그런가. 내기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신령이 크게 웃어서 또 당황했다. 내가 맞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의 모든 촉수는 신령의 기분을 살피느라 바빴다.


‘신령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도 몰라. 좋은 일이 있었나? 도대체 뭐지?!’


내 자리에 돌아와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신령의 변화를 감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적어도 나 때문에 기뻐하는 중은 결단코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계속 몸을 낮추고 있는 게 맞았다.


그러나 점차 알 수 없는 충만감이 차올랐다. 넘어져 한참을 허우적댔지만, 이제는 잘 털고 일어선 기분이었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듯했던 깔딱고개를 잘 넘어서 평지에 다다른 듯했다. 힘이 들어 숨 가빠하며 구부정한 몸으로 땅만 보고 걷던 내가 비로소 어깨를 펴고 편히 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두 눈에 파란 하늘이 들어오고 저 멀리도 내다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보지, 뭐.’


플라워한테 전화를 걸어 직접 재계약 여부를 물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사무실에는 아무일도 없는 듯한 정적 같은 시간이 흐르는 중이었지만, 나는 비로소 나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내가 나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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