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내가 진짜 화가 났던 이유

-나는 퇴사 초년생입니다

by 문성옥
1년을 시한부처럼 살며 정을 주지 않는다.
계약직이라는 수식어 안에 자기를 숨기고 살고 있다.

분노가 지나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니 그때서야 내가 진짜 무엇에 화가 났었는지 알게 됐다.

신령의 꾸지람이 무서워 ‘실수하지 말자!’ 이를 악물며 발버둥 칠 때는 어이없는 황당한 실수까지 하며 좌절감을 맛보았다. 실수를 줄이기는커녕 속출하게 만드는 업무 여건은 더욱 뼈 아팠다. 이를 모르지 않을텐데 오히려 무관심하고 혹은 냉대하는 사무실 사람들은 나를 화나게 했다. 이런 날들이 거듭되면서 분노가 차오르고 몸은 구석구석 망가졌다.


몸이 성치 않으니 내 마음도 계속해서 성을 내기 힘들었다. 일단 몸을 돌보고, 마음은 내려놨다. ‘실수해도 할 수 없다, 지적을 당해도 할 수 없다’ 하며 체념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으니 실수가 잦아들며 내 기본기가 나왔다. 하루하루 평온을 찾아갔다. 어쩌다 실수가 나와도, 아차 싶어도, 너무 많은 의미를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츰 원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풍 쏘는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한 지 반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 사이 사무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단톡방에서 퉁명스러운 말투로 무관심한 척하면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제트가 홀연히 퇴사했다. 적응하기도 바쁜데 아는 척 않고 투명인간으로 여겨줘 차라리 감사하던 제트가 사라지고 보니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시원했다.


물론 그래서 일이 더 쉬워진 것도 아니었다. 늘 전투적인 말투의 엠은 제트의 업무를 고스란히 인수인계 받고서 더욱 날이 섰다. 단톡방에서 짜증은 노골적이었고 그 화살의 종착지는 내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더는 엠의 불화살에 당하지 않았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실수가 두렵지 않으니 대범해졌다. 그럴수록 실수가 사라지고 나를 향하던 활시위도 느슨해지고, 슬그머니 방향도 바꾸는 눈치였다.


어느 날 엠도 곧 퇴사한다고 단톡방에 인사를 남겼다. ‘그렇게 길길이 날뛰더니 무슨 일일까. 다른 데로 이직하나. 작년에 결혼했지, 아마, 임신을 한 걸까. 그래서 그만두는 건가.’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직접 묻지는 못했다. ‘아마 너무 힘들어 누군가에게는 쏘아붙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나였던건가.’


묻지 못한 말은 그대로 남겨둔 채 엠도 떠나보냈다. 다른 이들에게도 딱히 궁금한 내색을 하지 않았고 그들도 아무말이 없었다.


나는 그 몇 개월 동안 그 누구와도 친분을 쌓지 못했다. 나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사무실의 모두가 그렇다고 위로했다. 대부분이 계약직인 이 곳은 1년을 시한부처럼 살며 서로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재야로 물러나서도 무림에서 쌓아온 실력을 감추기 어려워 툭하면 장풍을 쏘아대는 내공의 소유자들이지만 모두가 계약직이라는 수식어 안에 자기를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내가 나로 회복하는 사이, 나를 짓누르던 기운들이,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그들을 대신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수 개월만에야 업무에 익숙해진 나는 이제 막 들어와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새내기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펴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때서야 내가 그전 몇 개월간 화가 나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실은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내 실수를 용인할 수 없었다. 지적질하는 신령이나 말을 쏘아붙이는 엠보다 내가 나를 더 치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공은 섣불리 자신할 수 없어도 기본도 안되는 조무래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수의 포스를 풍기고 헛기침으로 사람을 나자빠지게 하는 신령 앞에서 ‘나도 잘 한다’ 인정을 받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기대하는 나는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누구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화를 불러일으켰는지 모른다. 몸에 힘이 들어가니 엉뚱한 헛발질을 하게 되고 꽈다당 넘어지는 꼴불견이 됐던 것이다. 그러니 부끄럽고 창피하고 짜증나고 모멸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내 발로 재야로 나왔다고는 하지만 무림이 힘들어 도망쳐 나온 비겁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바. 더는 낮아지기 싫었던 것 같다. 계약직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편치 않은데 일도 못하는 바보등신이고는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나니 조금씩 수긍이 됐다. 내가 나를 바로 볼 수 있게 됐다. 한때 내가 그 무엇이었건, 지금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분노가 지나가고, 눈앞을 흐리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던 폭풍이 사그라들었을 때, 내 계약기간이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늘 인생의 깨달음은 마지막에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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