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소처럼 열심히 일한 세월 35년
ii) 소처럼 열심히 일한 세월 35년
6월이면 남반구 브라질의 겨울은 이미 시작되었다. 햇볕은 따사한 가운데, 하늘은 높고 눈이 시도록 파랗다. 그 파란 바다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은 온갖 상상을 자아내는 형상으로 수시로 변하면서 에어쇼(Air Show)를 연출한다. 사무실 북창 너머로 보이는 푸른 초원 위의 창공과,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흰 구름을 쳐다보노라면 흘러간 내 청춘이 저 하늘 구름만큼이나 덧없어 보여 순간 깜짝 놀란다. 북서쪽 창공에서 용맹하게 갈기가 선 숫 사자 모양의 구름이 바람을 타고 북동쪽으로 흘러가는데, 눈 한 번 깜박이고 다시 보니 어느새 그 구름의 갈기와 날랜 발은 사라지고, 길게 꼬리 풀어 늘어진 혜성의 모습으로 떠밀려 간다. 저 명멸하는 구름의 모습이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부운인생 풍취산운(浮雲人生 風吹雲散),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표현되는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되면서 30년 전으로 머릿속의 시계가 되돌아간다.
1986년 봄의 말년 육군 병장 시절, 나는 따사한 봄 볕 아래 모포 깔고 누워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모 경제 신문에 연재되던 기업 소설을 책으로 역어 출판된 백시종(白始宗)의 “걸어 다니는 山”이었다. 이 기업 소설은 S 그룹, H그룹, D그룹 등 당시 쟁쟁한 3대 재벌 기업 중에서 내 마음을 H 그룹으로 편향하게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 백시종은 한국 경제 태동기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를 이끈 두 견인차, 즉 S그룹과 H그룹의 다이내믹하고 저돌적인 기업 활약상을 그려 내고 있었다.
특히 S그룹 창업자 L 회장과 H 그룹의 J 회장의 업적과 경영 스타일을 자세하고도 대비되도록 기술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S 그룹에 입사하고 싶었는데, 이 책을 읽고 마음을 돌려 H 그룹에 호감이 더 갔다. S그룹이 밀가루나 설탕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옷이나 전자 등 경공업 제품이 주력 업종일 때, H는 건설, 중공업, 자동차 등 무거운 제품이며 해외에서 돈을 버는 스케일이 크고, 국내보다는 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를 한다는 점에서 비교 조명되었기에, 나는 H 그룹의 ‘밖에서 벌어서 안을 살 찌운다’라는 애국자적 모습에 마음이 쏠렸다. 젊은 놈으로서 무언가 적극적이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고 진취적이며 도전적인 직장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그때 H그룹의 상반기 대졸 신입 사원 모집 광고를 보았고, 이미 백 시종의 소설에서 자극받았기 때문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지원해서 H그룹에 입사했다. 1986년 6월 1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만 30년 전, 사직 공원 옆, 구 서울고등학교 자리의 연수원에서 입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H 그룹은 주력 기업이 건설과 중공업에서 자동차로 그 중심이 옮겨 가고 있었다. 일본 M 자동차에서 가져온 도면으로 만든 엔진을 탑재한, 조랑말이라는 뜻을 가진 차의 미국 수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조랑말 차의 미국 수출은 당시 어마어마한 일대 사건이었다. 비록 엔진은 일본 기술로 만들었지만 부품부터 차체까지 순수 우리의 기술로 만든 첫 국산 자동차가 세계 자동차 산업의 중심이며 까다롭기로 유명한 안전 규정을 가진 미국 시장에 수출된다는 것은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다수의 우리 입사 동기들은 H 자동차로 배치되었다.
연수 중의 에피소드이다. 당시 울산에는 ‘쥬리원 백화점’이 있었고, 그 백화점이 가장 컸으며 가장 번잡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사 담당자가 군중 속에 숨어서 채점하는 가운데 나는 백화점 정문 앞 도로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모아 연설을 해야 했다. 일종의 후안무치(厚顔無恥) 담력 테스트였다. 최고의 담력은 그룹 창업자 J 회장이 가지고 있었다. J 회장은 울산에 세울 조선소 설계도 하나만 달랑 가지고 런던에서 조선소 건설 자금을 빌렸고, 바로 그리스로 날아가서 선주에게 당시 우리나라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 주면서 한국은 전통적인 조선(造船) 강국이라고 뻥(?) 쳐서 배를 수주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당시 타 메이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의 조랑말 차를 팔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배짱과 담력은 필요했고, 그래서 신입 사원 교육 프로그램에 그런 과정이 들어갔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백화점 앞 화단에 뛰어 올라가 광신도 마냥 고래고래 소리치며 관중을 모아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 H 자동차 신입 사원 진의환입니다. 제발 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5분만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울산 시민 여러분! 저 좀 살려 주세요! 여러분! 저기 숨어 있는 사람이 나를 채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저는 태화 강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이 사진의 여자가 시집을 못 갑니다.” 몇몇 사람이 하하하 하고 웃자 무슨 일인가 하고 호기심에 끌린 군중들이 모였다. 일단 사람을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한 것이었다. 나는 본론에 들어갔다.
“여러분! 우리 울산 공장에서 만든 조랑말 차가 미국에 수출되기 시작한 거 뉴스 봐서 아시죠? 이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나라도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일본, 독일, 프랑스와 어깨를 같이하는 자동차 선진국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가 어느 회사인지 아십니까? 미국의 GM 사입니다. 이 회사가 세계 각지의 공장에서 일 년에 생산하는 자동차가 자그마치 600만 대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굴러 다니는 자동차가 총 200만 대 밖에 안됩니다. 우리 회사는 이제 일 년에 35만 대를 만듭니다. 우리의 H자동차가 세계 제일의 자동차 회사가 되도록 제가 밑거름이 돼서 울산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유세장의 국회의원 후보같이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로 뻥을 쳤다. 당시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H 자동차의 서열은 25등 밖이었다. 자체적으로 엔진을 만들 기술도 없었다. 일본 M 자동차에 로열티를 주고 사온 엔진 도면을 가지고 와서 배우면서 일본인 기술 고문을 신처럼 떠 받들었다. 그 일본 기술 고문의 말 한마디는 바로 법이요 교리(敎理)였다. 당연히 일본어를 못하면 승진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그러다가 미국 수출 개시로써 모든 바람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일어에서 영어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입사하면서 그 바람을 탔다. 신입 사원 때 내 업무는 미국의 법제를 알고 미국에서의 모든 법률문제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대학 때까지 한 번도 안 해 본 영어 듣기(Hearing) 능력 향상을 위해 AFKN 방송 테이프를 듣고, 출퇴근 시에는 카세트를 호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귀에 달고 다녔다. 1987년에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고 위스콘신 법대에 가서 공부도 했다.
그로부터 30년. 이제 HK 자동차 그룹은 연간 800만 대를 생산, 판매하며 세계 5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자리 잡았다. (참고 2015년 순위: 전 세계 1위 도요타 그룹, 2위 복스바겐 그룹, 3위 GM 그룹, 4위 르노-닛산, 5위 HK자동차 그룹). H자동차의 옛날 스승 일본 M 자동차는 까마득하게 뒤에 서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는 H가 개발하여 새로 만든 성능 좋은 엔진을 일본 M 자동차에 팔고 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요 대 역전 드라마이다. 한 때 세계 2위 포드 자동차로부터 기술을 받아 차를 만들어 국내에 판 적 있었으나 이젠 포드 자동차도, 혼다 자동차도 H자동차 뒤에 서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자였던 GM은 이제 하이에나 모습으로 변해가고, 표범 같던 M 자동차 구름은 이미 혜성처럼 긴 꼬리를 드리우고 저 하늘을 지나간다.
얼마 전 직원들과 관계사들 법인장들을 모아 내 환갑 기념 회식을 했다. 35년을 돌아보니 나는 H자동차 내에서 가장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재직 35년 중 20년을 직원으로, 15년을 임원으로 일했다. 독특한 점은 35년 중 24년을 해외에서, 11년을 한국에서 근무했다는 것이다. 그 해외에서의 24년 중 총 5개의 자동차 공장 부지를 물색하고 주정부와 담판하여 인센티브를 얻어내서 풀 밭 위에 공장을 건설하고(Green Field Project), 조직을 갖추고 안정화시키는 데 헌납했다. 물론 현장에서 쓰러지는 고비도 몇 번 있었다.
신입 사원 연수 시절 울산 주리원 백화점 앞에서 고래고래 지른 내 목소리는 황당한 꿈만은 아니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35만 대에서 800만대로 성장하는 급격한 기울기의 상향 그래프에서 나도 그 속의 한 점이었고, 그때의 내 땀도 그 그래프에 스며들었음에 자부심을 느낀다.
꼬뚜레가 단단히 내 코를 관통하고 있던 세월인지라 난 그저 소처럼 일했다. 이제 35년을 몸 바친 회사를 나와 이 글을 쓴다. 흘러간 내 청춘은 구름처럼 덧없지만, 그래도 내 땀이 배인 자동차 공장은 오늘도 힘차게 돌아간다. 그 세월 속 젊은 날의 탱탱하던 얼굴에는 어느새 눈주름이 자글자글 해졌고, 귀밑 털은 다시 검정 염색약의 도포(塗布)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