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고향이라는 꼬뚜레
iii) 고향이라는 꼬뚜레
1984년 2월 13일 아침 8시경. 아직도 엄연한 겨울의 한기에 온 몸을 으스스 떨며 공주 차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고등 동창 O에게 전화했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O는 전화받자마자 차부 근처의 음식점으로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고마웠다. 소주 한 병에 따끈한 해장국 한 사발씩 먹었다. 아침 해장 후 바로 우리는 연무대행 버스에 올랐다. 연무대 수용 연대 앞은 시장 바닥 같았다. 울고, 껴안고, 노래 부르고…. 그 바글바글한 와중에 볼펜, 바늘과 실, 노랑 고무줄 파는 아줌마들은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그것들을 안 사서 입대하면 큰 일 날 듯이 말했다. O와 나는 조용히 이별의 포옹을 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수용 연대에 정문 안으로 힘 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부터 내 호칭은 ‘충남장정(壯丁)’이었다. 새로 지급된 헐렁한 군복 입고 3일 동안 나는 ‘충남장정’들 속에 묻혀 있다가 논산 훈련소 XX연대에 편제되었다. 수용 연대에서 훈련소 내무반까지 쭉 같이 온 몇 명의 충남 장정이 있었다. 훈련소 우리 내무반은 경상도 전라도 서울 등 각도의 훈련병으로 혼합 구성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장정’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훈련 기간 중 어느 일요일 오후 내무반에서 각자 쉬고 있을 때 기간병이 들이닥쳐 소리친다. “야! 작업할 게 있으니 각 내무반에서 10명씩 연병장 집합해라.” 그러자 경상도 출신 훈련병(군대 용어로 문둥이)들은 “아이고 똥 마려” 하고 관물대에서 화장지 꺼내서 화장실로 가고, 전라도 출신(군대 용어로 따블 백)들은 빨랫감 들고 세면장 가고, 서울 뺀질이들은 PX로 도망간다. 결국 연병장에 나가 보면 수용 연대에서 만난 ‘충남장정’들만 나와 있는 걸 보았다. 그래서 군대에서 ‘멍청도’란 말이 생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어디 가든 부지런하게 솔선수범하기 때문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절대 약싹 빠르지 않다. 어떤 땐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어지간해서는 속 내를 잘 드러내지도 않는다. 얼굴 표정과 동작 그리고 말에서도 호(好), 불호(不好)를 철저히 은폐시킨다. 충청도 말은 느리고 어눌한 것 같지만 그 대신 짤막하게 요점만 정확히 표현한다. 장마와 삼복더위에 지쳐 있을 때이다. 충청도 영양탕 집에서 어제는 복날이라 맛있게 먹었는데 오늘도 그것이 있는지 알고 싶은 경우의 대화는 이렇다.
“개 혀~?”
“해~유”
또 다른 예를 들면, 밤에 잠자다가 부인이 부스럭거리자 남편이 눈치채고 물어본다.
‘헐 껴~?”
“됐~유~”(N0)
이 얼마나 간단명료하고 신속한 대화인가? 충청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김정열, 김학래, 남희석, 서경석, 최병서, 이영자, 최양락, 황기순… 이들의 공통점은? 잘 알다시피 충남 출신 개그맨이다. 그럼 왜 개그맨 중에는 충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을까? 말이 느린 듯하나 함축적이며 우회적이고 때로는 기습적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추석 날 아침. 서울 사람이 서산에 있는 장인 집에 일찍 가서 인사하고 골프 나가려고 급하게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좁은 시골길이라 추월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앞에 가는 충남 번호 차가 너무 느리게 가는 것이었다. 조급증이 난 서울 사람이 클랙슨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올렸다 내렸다 해도 좀처럼 길을 비켜주지 않다가 마침내 충청도 사람이 차를 길가에 세우더니 차문을 열고 서울 차를 세웠다. 서울 사람이 긴장했다.
그러자 충청도 사람이 점잖게 한마디를 천천히 한다.
“아니~? 그렇게 급하시면 어제저녁에 내려오지 그랬유~~?”
삿대질과 욕이 나올 줄 알고 긴장했던 서울 사람에게 이 얼마나 통쾌한 기습적 반전이며 훈계적 유머인가!
충청도 사람들은 속내를 먼저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협상의 달인이다. 충청도 어느 농가 부부가 마루에서 아침밥을 먹고 잇는 데 이웃집 아저씨가 온다. 밥시간에 손님이 불쑥 와도 밥 대접하는 게 우리의 인심.
이웃집 아저씨, 아침밥도 얻어먹고 막걸리까지 한 잔 얻어 마시고서도 좀처럼 갈 생각을 안 하고 계속 이런저런 얘기 하며 앉아 있는다. 참다 지친 주인아줌마가 먼저 물어본다.
“그런데 용식 아버지, 아침 댓바람부터 우리 집엔 왜 오셨대유?”
그제야 이웃집 아저씨, 온 용건이 생각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한다.
”아이고 내 정신이야! 낫 좀 있유?”
내가 충청도 사람의 이런 협상 전법을 인도에서 써먹었다. 회사 보호 차원에서 부득이 인도 조폭 두목과 (대외적으로는 집권 정당의 청년분과위원회 위원장) 용역 계약 금액을 협상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쪽에서는 용역비로 500만 루피를 불렀고 나는 200만 루피를 고집해서 합의가 안 되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최후 담판을 하러 그 두목 집에 새벽 4시 반에 약속을 하고 그 집에 들어갔다. 그 사람은 잠자다가 일어나 응접실에 나왔다. 난 한 시간 동안 김빼기 작전에 들어갔다.
“아이고 이 소파 멋 있네유! 얼마 주고 샀유? 어디서 샀데유? 아이고! 이 그림 참 멋있네유. 화가 이름이 뭐래유? 어디 가면 살 수 있대유? 이 가구는 100년도 더 된 것 같으네유! 무슨 나무로 만든 거래유??” 등등.
나의 끊임없는 허드레 질문에 드디어 그 두목,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어이, 미스터 진, 새벽부터 이런 얘기 하려고 온 거 아니잖아? 좋아! 내가 100만 양보해서 400만으로 합시다.” 나는 천천히 답했다.
“250만으로 해유~.”
성질 급한 그 두목 “에이! 졸려 죽겠는데… 그래 300만으로 하지.”
이렇게 해서 한 시간 김 빼기 덕분에 협상은 2분 만에 끝났다. 이게 충청도인의 끈기 있는 김 빼기 협상 전법이다.
충청도 사람은 같은 말이라도 긍정과 부정이 다 포함되는 것처럼 말한다. 듣는 사람이 주의 깊게 듣고 판단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내 보직은 서울 본사의 관재과장이었다. 관재과장은 부동산을 사고팔고, 부동산 개발 및 건축에 관한 각종 인허가를 획득하는 게 주 임무였다. 그때 충남 모 처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공장 건설 현장에서 긴급 SOS를 요청해 왔다. 회사 인허가 팀이 파견 나가 있었는데 그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이라서 충청도 공무원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인허가 진도가 안 나가니 충청도 사람인 내가 내려와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상황이었다.
충청도 사람인 담당 공무원 김 계장에게 우리 인허가 팀 경상도 직원이 가서 이야기했다. ‘”계장님, 오늘 복 날이라서 배나무 골에 보신탕 준비해 놨으니 저녁에 거기로 오시지요.”
“됐^유”
그날 저녁 아무리 기다려도 김 계장은 안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음날 인허가 팀 직원은 촌지 봉투를 준비해 가서 김 계장 옆에 붙어 봉투를 슬쩍 내밀며 한 마디 한다.
“계장님, 어제저녁 보신탕 드시러 오신다 하더니 안 오시고…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휴가 가실 때 여비 하세요”
”됐~~유~”
이 말에 그 직원은 또 헷갈린다. 어제도 ‘됐유’ 하고 안 왔으니 ‘됐유’가 분명 부정이라고 생각하고 내밀던 봉투를 슬그머니 빼서 다시 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와 버렸다. 이러니 인허가 업무가 제대로 추진될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 집에서도 발생했다. 신혼 때 우리 집에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저녁상 물리자 경상도 새댁인 와이프가 물었다. “아버님에~ 디저트로 과일 드릴까에?”
“됐~다~”
이 말에 아버지는 먹고 싶었던 과일도 못 드시고 … 그렇다고 체면상 달라고 말씀도 못하시고…
다. 내 불찰이었다. 와이프에게 충청도 말 뜻을 잘 가르쳤어야 했는데…. 불효자의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충청도 사람이라는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선입관은 나에게 꼬뚜레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말은 느린 듯 하지만 급한 성격은 내가 스스로 꼬뚜레를 차는 것처럼 늘 나를 긴장시키고 여유와는 거리가 먼 늘 부지런한 삶을 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