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잘 살면 되지

리더의 의자는 누구의 것인가

by 무정
병원 입원한 김에 책 왕창 읽는 중




대통령 선거날 의외로 많이 들었던 말이다. “누굴 뽑아도 난리인데, 우리만 잘 살면 되지”라는 말..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선거 후보에 나온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우리랑 생각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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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말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 이 나라와, 이 세계 그리고 이미 망가져버릴 대로 망가져버린 자연이 유지되면 된다는 말일까.

우리가 죽기 전까지 직접적인 전쟁이 터지지 않고 그냥 지금처럼 유지되면 된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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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그 말은 참 이기적인 것이고, 무서운 말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 생각을 권력과 힘을 가진 정치인이 하게 되었을 때, 국가의 장기적인 운명은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많게는 50년 남은 그들의 최종 목표는 본인이 죽기 전까지 이 나라가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 테니까.

결국 인간의 최종 목표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을 포함하여 정신적인 고통까지도.

인간은 성숙될수록 이타성을 발휘할 범주가 확장된다.

개인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불특정 다수로 확장된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와 미성년자 그리고 사회 초년생 또는 환경적인 요인으로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인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 또한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아직은 남의 그릇을 걱정할 때가 아닌 본인 그릇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대상은 ‘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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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이가 들어 본인이 책임져야 할 대상들이 늘어나면, 즉 ‘가족‘이 생기면 그들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대상은 확장된다. 개인에서 가족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을 낳아준 부모와 피를 공유한 형제들도 있지만 부모와 형제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성취물을 배분해 줘야 할 대상이 아닌 경제적, 물질적인 자원을 지원해 주고 정서적인 지지를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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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이 직접 배우자와 함께 아이들을 낳고 길러보면서 부모와 형제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뒤늦게 효자, 효녀로 둔갑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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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이 성숙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선 사람들이며 보편적으로 사회가 옳다고 정해준 도덕, 윤리 사상을 초월하여 개인이 추구하고 있는 우선순위에 맞게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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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가족들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죽을 것을 감안하고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국가가 없으면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속세에서 벗어나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도를 닦으러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

이들도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뒤로하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사상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국가 경제에 기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하여 본인을 통제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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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

그는 이미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한평생을 걸쳐서 연구에 매진한 인물인데, 슬프게도 가족들에게는 소홀했다고 한다. 첫째 부인의 장례식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식들과도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데 세 명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그나마 유대감이 있었던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조차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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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이 보인 과학과 연구에 대한 열정은 사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초월하여 개인의 우선순위에 맞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열정은 ‘사람들이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여하겠다’라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단순히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함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족을 먼저 돌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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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회가 정해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에 맞게 때로는 자기를 희생하고 통제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범주가 불특정 다수로 확장되었다고 생각한다. ​​​​

물론 이 불특정 다수는, 그들의 사상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한하여 제한된다고 할 수 있다. 도를 닦으러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속세에 얽매여 사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보고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선, 가치를 수행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들을 보고 영감과 자극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지 언정 사회적 책무를 던지고 회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독립 의사들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큰 뜻을 위한 움직임이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이 언제라도 죽을까 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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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은 결과론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편리성을 제공하였지만 그 의도는 본인의 순수한 호기심, 발명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이타성보다는 이기성이 더 컸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족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본인의 삶을 희생하여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므로 결과론적 이타적 행위로 정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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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사례를 꼽아 설명하고자 한 바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아닌 정말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은 때로 이타성을 발휘하는 범주가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보편적 가치를 초월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삶 더 나아가 가족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본인이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두려울 게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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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신념을 다른 단어로 정의해 보자면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통을 인내하고 성장하며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보통 긴 시간이 흘러 삶이 재조명되고 새롭게 재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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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리더의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사명감을 갖춘 사람들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본인을 희생하고 더 나아가 자기 삶에서 보편적 가치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감수할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이러한 희생은 절대로 강요될 수 없다. 오로지 본인의 내적 충동에 이끌려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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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범주가 개인 그리고 가족에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과 힘이 부여되면 결국 그들을 위한 정치가 될 것이고 나라가 될 것이다.

오늘도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