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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로우 Oct 25. 2024

르셰르픽션: 황무지

그는 서로 다른 목소리로 세상을 정탐한다.

그런데 여긴 낯설고 어두운 무한 공간이다. 

에이프릴의 방은 더더욱 아니다. 

에이프릴은 아직 파이를 찾는 중이다. 

방금 탄탄이 또 헛소리를 시작하고 있다.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 타다닥 타닥타닥


뒤쫓아 오는 타이튜너가 굉음을 낸다. 

에이프릴의 고막이 터질 것 같다. 

에이프릴의 눈에서 뿜어 나온 녹색 조명이 망막을 뚫고 번진다. 

텅 빈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등대처럼 에이프릴의 초록 눈은 이리저리 파이의 위치를 찾아 헤맨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유리 조각들이 보인다. 

조각 사이에 작은 숫자도 매달려 있다.


"탄탄. 위치!"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바보, 위치!"


에이프릴은 조급해졌다. 

어거스트 중 한 명이 무차별 빔을 쏘며 따라오고 있다. 

한 방이라도 맞으면 머리가 날아가고 모두 끝난다. 

지금까지 어떻게 견디며 준비한 날인데,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 


'실력을 보여주고 말겠어.'


타이튜너에 속도를 가하며 에이프릴은 유리 조각 사이를 비집고 전속력으로 날아오른다.

가속 페달을 밟자마자 몸이 중력을 잃고 붕 뜬다. 

순간 어거스트의 빔 건이 에이프릴을 뚫는다. 

수십 발의 빔은 에이프릴의 어깨를 숭숭 관통하고 있었다.


- 째레레엑 즈욱즉 ....


허공에 달린 거울이 한꺼번에 깨지듯 숫자와 유리 조각들이 사방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바다 건너 태양이 솟아오르듯 여명이 시작되었다. 

에이프릴의 어깨가 부서졌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끈적이는 더운 액체가 허리까지 줄줄 흘렀다. 


"아......!"


에이프릴은 탄식했다. 

파이는 바다 위 태양처럼 거대하다.

파이 아래에서 끝없는 바다를 수놓은 것은 가진 자들의 기억 회로다. 

광대한 기억 회로는 로봇의 눈이다. 

가진 자들의 몸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파이는 로봇의 눈으로부터 투영된 기억 회로의 신호를 받아 봄과 가을을 끝없이 영사하는 홀로그램이다. 

봄과 가을의 홀로그램 아카이브.

시간을 가진 자들아. 모두 이곳에 있었나?

에이프릴 뒤에서 어거스트가 끈질기게 쫓아와 빔 건을 연달아 쏜다. 

실탄을 장착한 오래전 전쟁터에서처럼 에이프릴의 살덩이는 쭉쭉 찢어진다. 

탄탄이 읊조린다.


[4월은 잔인한 달]


에이프릴이 산산조각 난다. 

그녀의 몸에서 동력액이 흘러내린다.

초록 눈이 점멸한다.

탄탄이 코드를 출력한다.


[에이프릴 - > 42번째 4월의 소녀]

[의심]

[판단  -> 위험]

[종료]


봄과 가을이 사라지기 전. 

세이아의 로고가 새겨진 양복을 입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사람들 머리에 기억 장치를 심고 있었다. 

그의 곁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 

장치를 심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깜빡거리는 빛이 뿜어 나왔다. 

수많은 어거스트들이 수술을 마친 시신 위에 검은 천을 씌우고 있었다. 

그날은 세이아의 파이를 추종하던 가진 자들이 고통 없이 영생을 누리는 기술이 공식화된 날이었다. 

가진 자들은 영생을 지키기 위해 탄탄이라고 부르던 ‘그것’에 시간의 기억 일부를 옮겨 심었다. 

이 일이 있기 전, 세상은 ‘에이프릴’과 ‘어거스트’라는 인간형 로봇을 출시했다. 

이 로봇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개체였다. 

그런데 봄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4월에 출시된 로봇 에이프릴이 말썽이었다. 

반란이 일거나 의심하는 로봇은 언제나 에이프릴 몫이었다. 

그것은 마치 땅에 숨어 있던 씨앗과 벌레가 4월이면 모두 살아있다고 외치며 땅을 뚫고 일어서는 것처럼, 

일제히 반기를 드는 모습과 흡사했다. 

시간이 지나 에이프릴은 가진 자의 기억을 훔치는 유일한 인간형 로봇으로 진화하였고, 어거스트는 에이프릴을 막기 위한 방어형 로봇으로 학습되었다. 

세이아는 에이프릴이 탄탄이라고 부른 ‘그것’을 파괴된 도시 곳곳에 덫처럼 숨겨놓았다.

‘그것’은 아직 남아있는 인간을 사냥하고, 에이프릴을 제거하기 위한 미끼로 쓰였다. 

‘그것’은 마치 신흥종교 집단의 올가미였다.

이는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 집적된 아우성이었다. 

아우성은 인간의 기록이자 인간의 문자이며, ‘문명’이라는 이름의 슬픈 얼굴이었다. 


*참조: 탄탄이 가끔 헛소리를 하는 것은 아카이브 기술로 대체된 인간의 기억 중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 앞부분을 거꾸로 말하고 있는 상황. 이것은 인간의 기억을 훔치러 오는 에이프릴을 제거하라고 어거스트에게 알리는 신호로 쓰인다.


황무지 


한 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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