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성에 대하여

by 겨울색하늘

예술에 특별히 소양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예술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소한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역시 그때부터였을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왜 갑자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그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내면에서 공학적 영감이 고갈되어가고 있으며, 모순의 실타래가 꽤 복잡하게 엉켜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마주보는 달의 앞면에서 특별한 것을 찾으려니 매일 보던 것만 보일 밖에요. 요컨대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면 새로운 장소로 가야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한동안은 한두 번씩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전시회를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얼마간 다니다보니 어깨너머로 들었던 설명들이 기억나고 익숙한 작품 경향과 시대에 맞는 화풍이 하나의 집합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한참 멀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림 앞에서 ‘별 게 다 예술이네──’ 라며 속으로 투덜거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나름대로의 성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예술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편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과연 예술성이라는 게 있기는 한건가?’ 라는 의문조차도 견고한 채로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직도 르누아르나 클림트의 전시회에서는 그림 앞에서 넋을 놓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만약 예술성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개인적으로 그것의 첫 번째 조건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경외심 비슷한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순간이어도 괜찮습니다, ‘저건 정말 굉장한데──’ 라는 감탄을 보편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겠지요. 뭐, 너무나 위대한 나머지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종종 보았습니다만, 과연 예술가만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물음표가 하나 생겨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증명은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예술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이쪽이 더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반면 모리셔스 섬의 수중 폭포와 같은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같이 감탄을 연발하고 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모두를 일반적으로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을 제외하고는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너무 기준이 높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리키 넬슨의 <가든 파티>에 이런 노랫가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 가사처럼 한 걸음 더 양보해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작가의 노력과 생각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도 있겠지요. 작품 자체가 대중을 감탄시킨다기 보다는 과정이 감탄시키게 되는 경우일 겁니다. 이런 경우까지 ‘예술성이 있다’ 라고 말한다면, 요컨대 예술이란 저마다의 색깔이 있는 거겠지요, 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예술성의 평가는 누가 하는가에 대하여, 사실 저도 그 부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예술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전시회도 열리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어느 전문가 집단이 동그란 원형 탁자 앞에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예술품’으로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인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술이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시점에서, 파란색안경을 쓰고는 파란 예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였을까요, 미술 시간이면 항상 저마다의 수채화를 그리거나 수수깡 같은 간단한 재료로 뭔가를 만들어 선생님께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런 분야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어서, 항상 중간의 점수를 받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면, 미술은 입시에서 중요한 과목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과목에 흥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이건 평가가 가능한 것이었는가, 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됩니다. 만약 초등학생인 내가 직접 제출하지 않고 피카소의 손을 통해 이름만 바꿔서 제출했다면, 그래도 과연 중간점수를 받았을까. 혹시 같은 학생의 같은 작품을 한 해 동안 매월 첫 번째 월요일에, 그러니까 열두 번 같은 작품을 제출한다면 과연 열두 번 모두 같은 점수를 받을 것인가, 아직도 궁금합니다.


요컨대 고흐같이 살아서 빛을 보지 못했던 예술가는 그런 게 아닐까요. 파란색 예술작품을 만들었더니, 마침 사람들이 전부 파란색안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흑백 모노톤의 윤곽도 희미한 별 볼일 없는 그림인 줄 알고 있다가 어느 순간 노란색안경으로 유행이 바뀐 것입니다. 그제 서야 선명한 그림의 선들이 드러나고 다채로운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 뭐, 실제로 앤디 워홀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술이라는 건, 결국 갖다 붙이기 나름인 걸까요.

이렇게 보면, 예술성 그 자체는 어쩌면 명백히 존재하는지도 모르지요.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으로 저마다 하나 쯤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술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건 물론이고 가능한지 조차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뭐──, 결코 초등학생 때 미술점수가 재미없게 나왔던 것이 갑자기 억울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와서 그럴 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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