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2003)‘ 생각

카메라가 담아야만 하는 것

by 유일한




정(停), 동(動), 정(停) 세상의 모습을 투영하는 예술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발전했다. 색을 이용해 세계에 실제 하는 물체의 평면을 그려내는 게 목표였던 회화는 사진의 등장으로 그 방향을 달리하였고 정(停)의 단계에서 물체를 가장 완벽히 모방한 예술인 사진은 영상 매체가 등장하며 동(動)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 단계에서부터 탄생한 영화 예술은 정적의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동적의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변화를 거듭해 가며 지금의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영화 매체는 다시 정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홀리모터스>(2012)에서 볼 수 있듯, 기술의 발전으로 아날로그 세대(필름)에서 디지털 세대(DCP)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놓인 21세기 영화를 보며 혹자는 환호하며 혹자는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는 동적인 것에서 다시 정적인 것으로의 변화다. 아날로그시계의 움직이는 시곗바늘과 디지털시계의 그 자리에서 깜빡이는 숫자 기호를 생각해 보라.)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더 나아가 그 사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영화 윤리성, 정치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에 대한 영화인들의 대답은 서로 상이하게 대립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크리스토퍼 놀란과 같은 감독들은 여전히 필름 촬영을 고수했지만 대부분의 감독들은 디지털 촬영으로 그 방식을 바꾸었고 라스 폰 트리에, 토마스 빈터베르 등이 일으킨 ‘도그마 95’ 운동도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발전을 거듭해 앞으로만 나아가는 이 지독한 격동기에 영화 <엘리펀트>는 영화 본래의 의식으로 되돌아와 우리에게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영화를 세상을 투영하는 예술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엘리펀트>라는 영화가 영화계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범적인 21세기 영화들에 대한 반성이자 선구적인 질문 그 자체가 되도록 했다. 영화를 감상하고 장면을 하나하나 되짚어 볼 때 우리는 영화, 더 나아가 총체적인 예술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학교 학생들을 한 명씩 집어 그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카메라는 각 인물들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길게 뻗은 복도를 지나며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 돌아가는 환풍기, 스쳐가는 선생님, 떠다니는 그날의 공기를 관객들이 감각하도록 한다. 그날은 새소리와 총소리가 함께하는 날. 푸른 가을 하늘과 죽은 시체가 함께 나뒹구는 날. 그날. 그 찰나의 순간은 그러나 영원한 순간. 죽음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영겁의 시간 속으로 유예되고 시간은 봉인되어 우리에게 순간순간 되돌아와 말을 건다. 정적. 그러나 소란거림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때 카메라는 클로즈업, 점프 컷 등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또한 영화는 극의 형식이 가지는 시청각 쾌감을 철저히 배제한다. 플롯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인물의 서사 또한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관객이 어떤 한 인물에게 몰입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방법론을 거부한다. 지나칠 정도로 정적인 카메라 속 인물들의 상호작용은 인과에 기반한 사건의 발달이 아닌 우연이라는 철저히 일상적인 산물에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엘리펀트>가 작동하는 원리이고 곧 영화가 다루고 있는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의 핵심임을 집고 있다.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건이 일어나는 논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인과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사건은 사건이 일어난 그 구심점에 교차하고 있었던 시공간에 하필 우연히 존재했던 무언가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카메라가 포착할 때, 사건에 대한 영화의 논리는 더 나아가 실존적인 질문이 된다. 장 폴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사건은 인과에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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