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아르메니아라는 작은 국가에 ‘사야트 노바’라는 이름의 음유시인이 있었다. 여러 나라에게 지배당하고 분열되기를 반복하는 혼란의 시기에 태어난 그는 빼어난 글솜씨와 악기 연주로 주목받는 예술가였다. 그는 그 당시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던 국왕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곧 국왕에게 미움을 사 궁정에서 내쫓기게 된다. 방랑 시인이 된 사야트 노바는 설 자리를 잃은 채 방황하고 결국 자국에 침입한 이란 군대에 의해 종교적 소신을 지키다 처형당한다. 영화 <석류의 빛깔>은 자국에서 내쫓긴 채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은 그 시인의 전기를 다룬다.
<석류의 빛깔>은 전기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엔 관심이 없다. 유년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자막으로 대체하고 대신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상징과 강렬한 색채의 이미지로 대체한다. 시인의 생애와 그 감정을 아무리 인상적인 이미지로 풀어냈다 해도,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그림과 같은 이미지를 앉아서 보고 있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꽤나 불친절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석류의 빛깔>만이 가지고 있는 영화 언어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
무언가에 의해 쫓기고 압박당하고 있는 사람이 꿈에서 무거운 추에 짓눌리는 꿈을 꾸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럴싸하다. 꿈이 그 꿈을 꾸는 사람의 심리를 반영한다는 명제는 꽤 명확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석류의 빛깔>은 그러한 논리를 가진 꿈 같은 영화였다. 대개 난해한 영화를 해설하는 데 있어서 ‘꿈’이라는 모티프가 자주 남발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영화야말로 꿈과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과 꿈은 은유와 상징의 표현이라는 지점에서 매우 흡사한 논리 구조를 가진다. 어떤 예술이든 꿈 같은 지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석류의 빛깔>은 어쩌면 시인 사야트 노바가 꾸는 꿈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석류의 빛깔>을 이끄는 동력은 몽환적인 색채의 활용과 반복되는 동작들이다. 영화의 오프닝, 새하얀 화선지에 석류 세 덩이가 놓이고 칼이 놓인다. 먹이 퍼지듯 석류의 밑에서부터 빨간 과육이 선지에 서서히 퍼진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생선이 석판 위에서 고통스러운 듯 입을 뻐끔거리고 어떤 남자의 발이 포도 덩이를 짓이긴다. 포도에서는 검붉은 과육이 찢겨 흘러내린다. 내레이션으로 시인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나의 삶과 영혼은 고통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와 과육의 붉은 이미지는 그 과일이 시인의 심장이고 과육이 마치 피인 듯,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조여 피를 짜내는 듯 강렬하다. 그 뒤의 화면들도 상징적이고 화려한 회화의 연속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시인의 고통과 고뇌를 이러한 감각적인 색채와 동작으로 풀어낸다.
하얀 색에 색을 칠하기란 쉽다. 하지만 이미 색이 있는 도화지에 색을 덧칠하기 위해서는 이미 칠해진 색보다 더 진한 색을 칠해야만 할 것이다. 영화는 이미 화려하게 채색된 도화지에 자꾸만 색을 덧칠하듯 과잉된 이미지를 연속해서 보여준다. 스크린이라는 도화지가 물감을 머금고 칠해지고 또 덧칠해져 그 스크린에 바람이라도 후 불면 화면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다. <석류의 빛깔>에서 가장 인상적인 색 활용은 시인의 옷 색이었다. 영화 속 시인은 시점에 따라 옷 색깔이 바뀐다. 그의 어린 시절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소년은 예술가가 되고 사랑에 빠지며 빨간 옷을 입고, 궁정에서 추방당하고부터는 검정 옷을 입는다. 그가 예술에 발을 들이고 몸에 칠해진 붉은 빛은 그의 열정이자 사랑이요 동시에 괴로움이며 그를 땔감으로 하는 화염에 의한 작열통이다. 활활 타오르던 그의 삶은 그가 궁정에서 내쫓기고 사랑을 실패하고부터는 검은 잿덩이가 된다. 시인은 구원을 원하지만 이미 불에 타 그을린 숯에 다시 색을 칠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고부터는 검게 칠해진 시인의 구원을 좇는 모티프가 반복된다. 돌판에 십자가를 그리기도 하고 화려한 양탄자를 덮어쓰기도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배경은 그의 점점 더 악화되는 상태를 상징하듯 포도 덩이들을 박스 채 짓이겨지고 사람들은 석류를 단체로 씹어 먹는다. 반복해서 춤을 추는 여인의 스카프도 하얀색에서 붉은색에서 이내 검은색으로 변한다.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예술가는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다시 하얀 옷을 입게 된다. 이때 하얀 옷은 시인의 어린 시절 그 하얀 색이 아닌 다 타버린 숯이 재가 된 듯 퀘퀘하다. 결국 그는 다 탄 재가 되고 나서야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렇듯 <석류의 빛깔>은 강한 채도의 색 활용과 회화적 이미지로 사야트 노바의 생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영화다. 위 색채 활용에 대한 서술은 영화가 활용한 상징의 극히 일부일 뿐, 영화 내내 묘사되는 이미지는 훨씬 방대하다. 다만 영화 속 장면을 일대일 대응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꿈도 주체의 무의식을 반영하지만 그것이 꼭 대응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석류의 빛깔>은 물론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불친절하다. 상징들을 하나하나 해석한다기보다는 영화가 주는 황홀한 이미지들을 마음 열고 하나하나 담아보시라. 화면의 색도, 습도, 온도를 천천히 느끼며 관람하다 보면 어느새 18세기의 예술가와 함께 꾸는 꿈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