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하루의 일과를 전날에 모두 적어두고, 때로는 시간별로 그날의 일과를 적어두기도 한다. 스케줄러 및 시간표 작성을 즐겨하며, 방안 한가운데에는 한 달의 일과를 빼곡히 적어놓은 화이트보드를 두고, 책상 위와 방 곳곳에는 달력과 시계들을 나열해놓는다.
이런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스케줄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산 인생 시간표’이다.
너 스무 살이니? 그럼 대학교 가야지.
스물셋? 졸업반이네, 취업은 했고?
서른 넘었어? 아직 결혼은 안 했고? 남자 친구는 있니?
직장인이니? 모아놓은 돈은 있고? 등등등...
누군가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사회의 대다수가 따르고 있는 이 시간표는 대학시절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도, 업데이트도 없고, 다양성도 없는 이놈의 시간표는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너 시간 정도는 날아가 줘야 효력이 없는듯하니, 한국에서 비행기로 10시간 가까이 떨어진 카타르는 내게 딱이었다.
물론 이 시간표에서 벗어나려고 해외취업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이것이 내가 해외 생활을 선호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누군가 말하기를, 승무원의 시간은 비행기 속도로 간다던데, 주어진 스케줄에 따라 비행 몇 개를 끝내고 나면, 어느새 책상 위의 달력은 홀로 몇 달 전의 시간 속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스물여섯, 카타르에 와서, 공항 지상직으로 4년, 승무원으로 4년. 참 정신없게도 살다 보니 내 나이 벌써 서른네 살이 되어있다.
몇 년 전부터는 결혼한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도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 부모님도 여기저기서 내 또래들의 결혼식 청첩장들을 받기 시작하셨었는데, 한국에서 떨어져 살아서인가, 남의 이야기 같았다.
내년이면 15년 지기 되는 나의 대학교 동창들 3명을 포함, 친한 친구라고는 채 10명도 되지 않긴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시집을 간 이가 없어 더욱 와닿지 않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동생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비행을 하다가 친해진 Y 양은, 원래 다른 숙소에 살다가, 내가 사는 빌딩으로 이사를 오면서 더욱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요리를 좋아하는 나와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Y 양은 식성도 대화 코드도 잘 통해서 시간이 맞을 때면 같이 밥을 먹으면서 한참 동안 속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사이였다.
Y 양의 결혼식 날짜는 다행히 내 휴가 기간과도 맞아서 참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번 추석 긴 휴가를 맞이해 간 한국에서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친지들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 축하를 나누고,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모습들을 보니, 이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인가 싶더라.
그날은 꼬마 하객들을 동반한 가족들도 꽤 있었는데, 가족들끼리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서 또 다른 누군가가 새롭게 가족이 되는 순간을 함께해 주는 것을 보면서,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라는 물음이 들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시간표가 다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지각한 학생에게 오늘 놓쳐버린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상세히 알려주는 옆자리 짝꿍처럼, 한국산 인생 시간표는 내가 놓친 부분을 되짚어주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결혼식은 어땠냐고 궁금해하던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딸은 나 언제 분홍색 한복 입혀주나?”
“잉? 엄마는 내가 시집갔으면 좋겠어? 언제는 가지 말라며”
“푸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엄마 아빠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만족이야.
마음껏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살아.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리고 결혼은 그다음에.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안 가도 괜찮고.”
아. 까먹고 있었다. 내가 시간표에 쫓겨 조급해할 때면 언제나 괜찮다며, 너의 인생을 살라며 내 편에 서주던 가족들을 말이다. 괜스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이다.
나는 한국산 인생 시간표를 선호하지 않는 것뿐이지, 본인만의 인생 플랜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각자의 인생의 우선순위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다르니, 본인의 취향이 담뿍 들어간 나만의 인생 계획표를 작성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누군가 정해주는 시간표가 아닌, 온전한 나만의 시간표 말이다.
그렇게 Y 양의 결혼식에서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최고의 결혼식 답례품을 얻은 셈이다.
추석 명절과 Y 양의 결혼식 참석을 포함한 나의 긴 휴가를 끝이 났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번 달 말까지 3개의 비행의 남아있고, 중간중간해야 할 일들도 많이 있다.
카타르에서 바쁜 삶을 사는 동안 나는 또 나이 시간표를 잊으면 살 테고, 다음 휴가가 있을 설날까지는 내 나이조차 까맣게 잊고 지낼 테지만. 다음에 이런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자신 있게 꺼내들 수 있을 ‘나만의 인생 계획표’를 준비해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