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
-박기옥 수필집을 읽고
박기옥 수필집 <담장 너머>를 펼쳐본다.
"수필이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문학장르'라면 작가는 당연히 ‘담장 너머’에 목말라야 할 일이다. 나는 여태껏 나의 담장을 쌓는 일에만 전념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거야말로 나와 남을 구분하는 바로미터로 이해하고, 나의 영역을 지키는 방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담장은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무언가가 있기에 담장이 생긴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낯섦을 꿈꾸며
'담장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매화는 주로 벼슬에 나가지 않거나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마당이나 뒷산, 텃밭가에 심어놓고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왜 하필 매화를 심었을까. 세상이 그들을 버린 것일까. 그들이 세상을 외면한 것일까. '평생을 추위에 떨지언정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梅寒不賣香’이 선비의 기상에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 -탐매探梅
‘매한불매향’은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상촌선생의 시구이다. 나 또한 이 시가 좋아 현관에 걸어두고 있다. 벌써 남쪽에는 매화가 피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잠시 편액을 우러른다. 각황전. '깨닫는 황제'라는 뜻일 터이다. 임진왜란으로 화엄사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을 때 보수 과정에서 왕실이 후원하면서 하사된 편액이다. 숙종이 직접 썼다고 한다.
기척을 느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홍매화가 보인다. 400년을 넘긴 매화이다. 매무새가 수수하다. 모진 풍파에 온몸이 틀어지고 상처투성이인 중에도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서 있다. 꽃도 한창이다. 너무 붉어 검은빛이 도는 채로 혼신의 힘을 다해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중이다. 하필이면 왜 홍 매화일까 " -홍매화
나 역시 화엄사 홍매화가 좋아 수채화로 그려, 서재에 걸어두고 있다. 홍매화도 벌써 피었을 것이다.
"내가 스물셋에 결혼한 일을 두고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시대와 성향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미망인'이라는 조항 은 없었다. 그것은 분명 함정이었다. 계약 위반이었다. 놀라운 음모였다. 우리 둘 중 아무도 그 일을 예견했던 사람은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이제 손주까지 둔 할머니가 되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라도 나처럼 잘하기도 하고 못 하기도 할 것이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머 지 삶도 걱정하지 않는다. 가슴이 뛰는 데로 가면 될 일이다. 인생은 언제나 지금이니까. “ -아모르파티
이 글을 읽으니 나의 지난날 '가난한 아내'가 떠오른다.
"생각해 본다. 하필이면 왜 눈일까. 어쩌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오랜 습관에 의한 징벌일는지도 몰랐다. 나는 태생적으로 문자 중독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글자를 몸에 묻히고 살았다. 신문이건 책이건 닥치는 대로 읽는 걸 좋아했다. 하다못해 국수나 과일 봉지에까지 글자만 보이면 코를 박았다. 나는 늘 무언가를 읽고 싶어 안달했고, 결핍과 갈증을 문자에 투사했다. 문자는 나에게 있어 출구였고, 딴 세상이었다." -부동시不同視
어떻게 작가는 나와 같은 병을 가지고 있을까. 나의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는 책에 미친 看書痴의 이야기이고, <하늘에서 보내온 신호>는 눈 주사 이야기이다. 이런 걸 두고 ‘同病相憐’이라 했나 보다.
”남편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료에 관한 모든 사항은 의사인 작은 시동생이 맡아서 했고, 돈 드는 일은 기업 대표로 있는 큰 시동생이 도맡았다. 아이들은 할머니한테 가 있었다. 나는 그저 붙박이처럼 남편 옆에 붙어있기만 했다. 그것만으로 도 얼굴에는 버짐이 돋았고, 입술은 부르트고 혜집어졌다. “ -돈
”혼자 산 지 꽤 된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다. 더러 아직도 퇴직한 남편에, 결혼한 자식들까지 가까이 끼고 사는 친구들을 보면 좋아 보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친구들도 나를 보고 같은 말을 한다. 좋아 보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한다. “ -담장너머
”고택 마루에 앉아 뭉게구름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어지러운 세상, 힘든 세월을 건너간 옛 선비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추구한 가치와 善을 가늠해 보았다. 남편과 자식을 가슴에 묻고 집보다 절을 더 가까이하셨던 고모님도 생각했다. 나의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서원 어디쯤일까, 절 어딘가에 바람처럼 머물러 있어도 될까. 아니면 한 그루 못 잊을 나무가 되어 깊은 산속 남몰래 홀로 서있을까. 또 아니면 구름처럼 훨훨 저 하늘 위에 떠 있을까. “ -종착역
”오래된 꿀병 뚜껑을 담장 너머로 해결한 날, 나는 산이라도 들어 올린 듯 기뻤다. 명절에나 올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담장 너머로 처리하니 스스로 대견했다 돌아보면 담장 너머에는 내가 도울 일도, 도움을 받을 일도 많을 것이다. 수필이 이래서 좋다. 별보다 달보다 좋다. -2026년 새해에 박기옥“
작가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아모르파티’라 규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 “라고 '담장 너머' 이 세상에 나 자신을 드러내며 힘주어 말하고 있다.
”수필은 이래서 좋다. 별보다 달보다 좋다. “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