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의 별이 되다
-금요일은 나 혼자 국중박 간다(5)
최원돈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난(亂)이다. 왜 전쟁이 아니고 난일까.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 싸움이지만, 난리는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려 제대로 된 싸움이라기보다 처참하게 당한 난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저들의 야욕 앞에 철저하게 유린당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성웅이 있었기에 그나마 7년 만에 이 난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들의 이순신' 전이 열렸다. 1층 상설전시관 중앙에 설치된 전시장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순신 장군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들의 이순신> 전시를 마련하였다. 일본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임진왜란이라는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서 한산도. 명량. 노량에서 큰 승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선조 임금은 명나라 진린 제독에게 이순신의 인간상에 관해 물었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세상은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이다. 아직은 내 뜻은 흔들리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내가 조선을 지킬 것이다. “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파도가 넘실댄다. 멀리서 거북선을 앞세우고 조선 수군의 함대가 다가온다. 나는 파도 속 바다 영상 한가운데 멈춰 섰다.
'이 전시는 그동안 보았던 이순신의 모습이 아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이다. 누가 이 사람을 '전쟁을 일으킬만한 위인이 못 된다'라고 하였나. 그의 체구는 비록 작았지만 다부지고 야심에 찬 지략가의 모습이다. 그는 조카에게 관 백의 자리를 물려주고 태 합이 되었다. 전국의 다이묘들을 나고야성으로 끌어모았다.
히데요시는 철저한 지략가였다. 나고야성에 집결한 15만 8천의 군사는 그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두로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를 부산포로 출발시켰다.
왜군의 침략에 조선은 무엇을 준비하였을까. 당시 바다를 건너 침략할 수 있을 거라는 가정은 당시 관료나 장수라면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라는 지휘 계통이 있기나 했을까.
어떻게 부산포 앞바다에 올 때까지 속수무책이었을까. 3만 대군을 이끌고 700척의 함대가 쳐들어올 때까지 조선은 무엇을 하였을까. 나고야성에서 몇 년 동안 진을 치고 있을 때와 대마도에 정박했을 때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는게 말이나 되는 걸까. 그렇기에 부산포는 하루 만에 동래성은 그 이튿날 함락할 수밖에 없었다. "분하고 원통하다. 분하고 원통하다."라는 이순신의 독백만 들려온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후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정비하고, 새로운 전선인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삼아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 대형 화포를 쏘며 일본군의 배를 부수었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었다. 거북선은 배의 지붕에 덮개를 덮어 그 위에 철촉을 박아 적이 쉽게 배에 오를 수 없었다. 전후좌우에서 포를 쏠 수 있었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살필 수 없게 했다. 거북선은 우리 수군을 보호하면서 적선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네 차례의 출전과 웅포 해전까지의 연전연승했다. 한산대첩의 승리는 좁고 암초가 많은 수로에서 넓은 바다로 펼쳐지는 지형과 해류의 흐름 등 자연조건을 잘 활용하여 적을 유인하고, 전투에 맞는 진법과 화포를 활용한 이순신의 혜안이었다. 학익진과 장사진은 평소 이순신과 전라좌수영 수군의 철저한 대비와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순신의 임진장초 壬辰狀草의 기록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여기에는 3년 동안 조정에 올린 장계 60여 편이 기록되어 있다.
"왜선에 갇힌 백성을 구하는 것은 적의 목을 베는 것과 같다. 반드시 살려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
1593년(선조 26) 7월, 이순신은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겼다. 부산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지리적으로 불리했다.
한산도는 일본 수군이 전라도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요새이자 거제도를 항해하는 배를 모두 감시할 수 있는 길목이었다. 조정은 수군의 일관된 지휘권을 위해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여 초대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일본군의 소총과 백병전에 맞서 화포 중심의 전술을 펼쳤다. 거북선이 적의 층루선 밑으로 들어가 용의 입에서 현자총통으로 철환을 쏘고 천자•지자총통으로 대장군을 쏘아 적의 배를 쳐부수었다.
거북선이 선두에서 적 지휘선을 향해 돌진해 근접 사격을 가하여, 판옥선이 각종 총통과 활을 발사해 적선과 적군을 살상하고 마지막에는 화공 火工으로 적선을 불태우며 전투를 종결했다.
이 전술은 일본 수군의 전투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본군의 조총은 육지에서는 위력적이었으나. 바다 위에서는 조총과 일본 전선의 한계 때문에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은 각종 대형 화포의 화력과 방어 장치를 갖춘 판옥선의 장점과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수 있는 거북선으로, 압도적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전시장 가운데 녹슬고 망가진 천자총통 하나가 눈길을 끈다. 저 총통은 어느 전투에서 저렇게 망가졌을까. 얼마나 쏘아댔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나는 한참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1596년(선조 29)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할 준비를 했다. 조선 침략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조선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바다로 나가 막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정보가 일본군의 모략이라고 생각했다. 군사들을 정비하는 데 시일이 소요되어 출전이 지체되었다.
1597년(선조 30) 1월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 상륙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은 출전을 지연하여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그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며 의연하게 홀로 책임을 졌다.
<다시 시작된 전쟁 정유재란>
1597년(선조 30) 2월 초 이순신은 파직되고 원균(1540-1597)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2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 1,500여 명의 일본군 배치를 마치고 전라도 점령에 주력하라는 구체적인 조선 침공 명령을 내렸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없는 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거침없이 격파하며 전라도를 장악하고 북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인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명령한 문서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년) 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을 결정한 후 다이묘들에게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렸다. 특히 전라도는 남김없이 철저히 공략한 다음 전략 거점인 성을 지을 장소를 찾으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침을 통해 조선의 남부를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지를 옅 볼 수 있다.
-옥에 갇힌 이순신을 구한 사람들
1597년(선조 30) 2월 26일, 한산도에서 체포된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옥에 갇혔다.
명령을 거부한 이순신에 대해 선조의 입장은 강경했다.
'조정을 속여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은 놓아주고 토벌하지 않아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다른 사람을 모함한 죄,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한 죄' 등 죄목으로 극형에 처하라 명했다.
정탁은 이순신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쟁 중의 장수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도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 전라 우수사 이억기, 정경달 등 이순신과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구명에 나섰다.
마음을 돌린 선조는 이순신을 극형에 처하는 대신 백의종군을 명했다.
정탁이 쓴 상소 '신구이순신차'의 초본에는 ‘이순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이순신과 같은 장수는 쉽게 얻기 어렵고, 죽인다면 오히려 적에게 행운이 될 것이므로 죽음을 면하게 하여 다시 한번 공을 세우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어떻게 ‘이순신은 죽어 마땅하다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임금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권력의 무서움이다.
-난중일기
이순신은 옥에 갇힌 지 28일 만인 4월 1일 풀려나 두 번째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남쪽으로 가다가 아산에서 잠시 머물던 4월 13일, 이순신은 어머니가 여수에서 아산으로 배를 타고 오던 중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비통한 마음, 서럽고 아픈 마음을 절절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백의종군 길이라 어머니의 장례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길을 떠나야 했다.
"정유년 4월 초1 일 맑았다. 옥문을 나섰다. 일찍 나와 길에 올랐다. 어머니의 영전에 참배를 올리며 목 놓아 소리치며 울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 같을 수가 있을까. 일찍 죽는 것만 못하는구나.
‘十九日己卯晴 早出登程 哭辭靈筵 天地安有如春之事乎 不如早死也’
(난중일기, 정유 4월 19일)"
난중일기 친필 본이다. 장군의 친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순신의 초서는 유려하고 굳건하다. 장군의 문장은 간단명료하며. 중언부언하지 않고 기록해야 할 것은 빠트리지 않았다. 때로는 한없는 시적 표현으로 갚은 감동과 여운을 준다.
”속 정유일기 1597년 (선조 30) 10월 14일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또 타고 찢어졌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하늘의 이치가 아니냐 그런 데도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치가 어찌 이렇게 어긋날 수 있느냐. 하늘과 땅이 캄캄하고 한낮의 해도 빛을 바랬다.
불쌍한 내 어린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하늘의 재앙이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있지만, 끝내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느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있고, 같이 울고 싶구나.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 또한 의지할 곳이 없구나. 잠시 견디며 목숨을 겨우겨우 이어 가겠지만, 마음은 죽었고 껍질만 남았구나. 목 놓아 서럽게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이 1년 같다. 하룻밤이 1년 같다. 이날 밤, 10시에 비가 내렸다. “
난중일기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문장이다. 막내아들 면이 왜군과 맞서 싸우다 죽었다는 서찰을 받고 이순신은 소금 굽는 강막지의 집에 가서 목 놓아 통곡했다.
‘하룻밤이 일 년 같다’ 이보다 더한 참척의 아픔을 말할 수 있을까.
난중일기 중 인상적인 대목 가운데 또 하나는 이순신의 감성 넘치는 시적 표현이다. 이순신은 무관이지만 시인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봄비에 젖은 날을 ‘일행이 꽃비에 젖었다’라고 표현했고, 배를 타고 이동한 날을 ‘달을 타고 오다’, ‘석양을 타고 오다’라고 적는 등 감성적인 언어가 일기 곳곳에 나타난다.
바다와 달, 바람과 파도에 대한 묘사는 특히 섬세했다. ‘바다의 달빛이 배에 가득 차’ 온갖 시름에 잠 못 이루던 밤을 시처럼 기록했고, 어떤 날은 ‘달빛은 낮과 같이 밝고, 물결은 비단결처럼 하얗다.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라고 소회를 남겼다.
‘한산도의 노래’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난중일기 속 이순신은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때때로 분노하고 지치고 흔들렸으며,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두려움 앞에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모습이 ‘성웅 이순신’에 가려진 ‘인간 이순신’을 느끼게 해 준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명량대첩 鳴梁大捷
1597년(선조 30) 7월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후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남원, 전주 등 전라도 지역을 짓밟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자기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그에게 나라를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흩어진 전선과 수군을 수습하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을 울돌목(명량)에서 막았다. 이순신은 고작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133척에 맞서 적장을 죽이고 전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좁은 해로워 조류를 이용한 전략과 절망에 굴하지 않고 맞선 결과였다.
명량대첩의 승리는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아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발판이 되었다. 명량대첩 후 이순신은 나주 보화도(지금의 목포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진을 옮겨 수군 재건과 피난민 보호에 힘썼다.
1598년(선조 31) 명의 수군이 합류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도독 진린 (1543~1607)의 관계를 신중히 조율하며 연합작전을 이끌었다. 명군의 약탈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전공을 명군과 나누자, 명의 장수와 병사들도 이순신을 마음으로 따르게 되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의 전과(戰果) 중 가장 빛나는 전공(戰功)이 아닐 수 없다. 백의종군하던 그에게 임금은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자신을 통렬히 반성하고 나라를 건져달라고 했다. 이순신은 ‘아직은 신에게 열두 척의 배가 있다”라며 결사 항전했다.
나는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이순신의 모습을 본다.
이순신은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는 백의종군 길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어머니를 순천에서 모셔 왔는데 아들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에서 아산으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화물 배편을 얻어 타고 엿새가 걸려 아산에 닿았을 때 어머니는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배에 관 棺을 싣고 있었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날 그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순천에 모실 때 가끔 찾아뵈면, 어머니는 아들을 어려워했고, 아들에게조차 내외를 했다. 어머니는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고 이부자리를 단정히 했다. 안아보면 어머니는 한 움큼이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오래된 아궁이의 냄새가 났다. 내가 안을 때,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며 수줍어했다.
'어서 가거라.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
그날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내 숙사로 찾아왔다. 그는 도원수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나에게 왔다. 그는 임금의 교서를 지니고 있었다. 그 교서를 내밀 때, 나는 그가 사약을 들고 온 의금부 도사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마당으로 내려가 교서 두루마리에 절했다. 양호가 두루마리를 펼쳐서 큰 소리로 읽었다. 임금의 수사는 장려했다.
'왕은 이르노라. 어허. 국가가 의지할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흉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 도의 군사를 한번 마음에 모두 잃었으니, 누가 바다 가까운 여러 고을을 지켜주리오.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들이 무엇을 거리리오….'
'지난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에게 백의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묘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것이,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한 죄인에게 임금이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임금은 강한 신하의 힘으로 다른 강한 신하들을 죽여 왔다. 양효는 계속 읽었다.
'이제, 그대를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같이 전라 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부하를 어루만지고 도망간 자들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새를 지켜 군의 위엄을 떨치게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군율을 범하는 자는 장졸을 막론하고 그대의 지휘로 처단하려니와, 그대가 나라 위해 몸이 있고 나아감은 이미 다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길게 하리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좌수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기나 입금을 긍정할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텅 빈 바다 위로 크고 무서운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각사각, 수평선 너머에서 무수한 적선들의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환청은 점점 커지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붓을 들어 장계를 써나갔다. 문장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런 의전상의 단어와 상투적인 어구를 끌어대며 장계를 지었다.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순신 올림
정유년 늦가을 나는 교서를 받들고 우수영에 부임했다.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적으로서 살고 죽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쓰면서 하루 종일 현충사에서 이순신의 긴 칼을 보았다. 그는 이순신의 긴 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소설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이순신의 참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를 수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이순신이 된 것이 아닐까. 나는 '칼의 노래'를 읽으며 비로소 이순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훈은 이 책을 쓰는 동안 무엇을 하였을까. 그는 문장 한 구절 토씨 하나를 위해 수백 번 궁리하고 궁리하였다. 그리하여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고 하였다.
명량대첩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흩어진 전선과 수군을 수습하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을 명량에서 막았다.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은 고작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백 133척에 맞서 적장을 죽이고 일본 전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좁은 해로로 들어온 적선에 대해 일자진으로 형성해 돌진하며 총포로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명량대첩의 승리는 좁은 해로워 조류를 이용한 전술과 절망에 굴하지 않고 맞선 의지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나아가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1597년(선조 30) 10월 전라도 나주 보화도를 임시 군영으로 삼았다가 1598년(선조 31) 2월 17일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 고금도는 전라 좌우도 안팎의 바다를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농장과 백성이 많아 식량 확보에도 유리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금도에서 군량을 확보하는 무기와 배를 만들며 수군의 재건과 민심의 수습에 힘썼다."
노량露梁의 별
명량해전 이후 일본군은 순천 사천 울산 등에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육군과 수군이 네 방향에서 일본군을 압박하며 울산왜성, 사천 왜성, 순천왜성을 공격했으나 큰 피해 속에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군은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려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노량에서 결전을 준비했다. 11월 10일, 조•명 연합군은 마침내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은 필사적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을 상대로 한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자, 이순신이 생애를 마감한 결전이었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였으니, 마치 자기 부모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 같았다. 이순신의 주검을 넣은 관이 지나는 곳곳의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차였고, 상여를 막으면서 "참으로 공께서 우리를 살렸는데,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라며 통곡하니, 길이 막혀서 상여가 나아가지 못하였다. 길 가는 사람 물도 모두 통곡하였다. (류성룡 징비록)”
다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는다.
"노량의 물결은 사나웠다. 치솟는 물기둥의 허리를 바람이 베고 지나갔다. 적들은 바다를 뒤덮고 달려들었다. 검은 깃발의 선단이 서쪽 수평선을 넘어왔다. 물보라에 뒤덮여, 적선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광양만을 떠난 순천의 적들이었다. 적들은 노량 수로를 향하고 있다. 쇠나 팔을 불어서 함대를 뒤로 물렸다.
적들의 살기는 찬란했다. 먼바다에서, 여러 방면의 적들은 합쳐지면서, 다시 거대한 반원진으로 재편성되고 있었다. 적선에 가려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적의 반원진은 바다 진지의 크기만 한 그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 속에서 수천의 적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적의 반원진은 더욱 다가왔다. 적의 전체였다. 내 앞에 드러난 적의 모든 것이었다. 적들은 수군뿐 아니라. 철수하는 육군 병력 전체를 배에 싣고 있었다. 적의 전체는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적들의 이물에서 흰 물기둥이 깨어져 나갔다.
그때, 적들은 경건해 보였다. 적이 경건했다기보다는, 나야말로, 그 앞에서 내가 경건해야 할 신비처럼 보였다. 신비, 신비라고나 해두자. 나는 대장선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빌었다. 무엇을 항해 빌었는지, 나는 빌고 있었다. 바다는 문득 고요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나는 물러섰다. 적은 다가왔다. 물러서는 물길의 섬마다 복병의 선단을 떼어놓았다. 나는 해협 쪽으로 물러섰다. 해가 오르자, 바람은 더욱 불었다. 바람은 적의 편이었다. 섬들이 포개진 수로 어귀에서 적의 반원진은 선두부터 오열 종대로 바뀌었다.
나는 중군을 몰아 관음포로 향했다. 거기서 포구의 어귀를 막고 안쪽을 찌를 판이었다. 적선 2척이 내 대장선 앞뒤로 달려들었다. 뒤쪽에서 중군장이 달려 나와 앞에서 달려드는 적선을 막았다. 나는 대장선 장대에서 소리쳤다.
"관음포가 급하다. 관음포로 가자."
난간에 늘어선 적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쏘아댔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전부터 내 몸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안 사 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떨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북을…. 계속…. 울려라. 관음포…. 멀었느냐?"
송희립은 갑옷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북을 울렸다. 난전은 계속 중이었다. 싸움의 뒤쪽 아득한 바다 위에서 노을에 어둠이 스미고 있었다. 적선을 태우는 불길이 바다 곳곳에서 일었다. 등판으로 배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격군들은 관음포를 향해 저어 가고 있었다.
싸움터를 빠져나가 먼바다로 달아나는 적선 및 척이 선창 너머로 보였다. 밑물이 썰물로 바뀌는 와류 속에서 적병들의 시체가 소용돌이쳤다. 부서진 적선의 파편들이 뱃전에 부딪혔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 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 칼로 베어 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
"오호통재라."
우리의 이순신은 마침내 임금의 손에 죽지 않고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오매불망 고대했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곳은 자신이 그토록 그리웠던 이들의 나라였다.
이순신의 바다가 춤을 춘다. 이순신의 이야기가 줄지어 올라온다. 전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득하다. 모두 바다 영상 속에서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이순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세월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이야기, '우리들의 이순신'입니다. “
‘우리들의 이순신’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들 모두의 가슴속 깊게 남을 것이다.
이 족자는 이순신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전라남도 여수에서 1620년(광해군 12) 건립한 ‘統制李公水軍大捷碑’를 탁본한 것이다. 이 비석은 이순신의 비석 중에서 최대 규모로 지대석과 귀부, 용무늬 이수를 갖추고 있다.
전액 篆額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썼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김현성이 썼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 노랑, 명량 세 곳을 막아낸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고, 전쟁 중에도 둔전을 경영하며 아랫사람들을 돌본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옆에는 이 비의 건립 경위를 기록하기 위해 1698년(숙종 24)에 세운 ‘동령소갈비 東嶺小碣碑’가 있다. 반대편에는 1603년(선조 36)에 세운 ‘타루비墮漏碑’가 있다. '타루비'는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비라는 의미로 전라좌수영의 군사들이 이순신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나는 이 비석을 수년 전 아내와 함께 여수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 저녁노을에 비친 비석을 오랫동안 보았다. 오늘 '통재공이공수군대첩비' 탁본 앞에 깊이 고개 숙여 묵념을 올린다.
'충무공이시여. 삼가 소생이 깊이 고개 숙여 진심으로 묵념 올립니다.
장군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조국에서 두 번 다시 임진왜란과 같은 난리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웅이시여, 부디 우리 조국을 지켜주시고 고이고이 잠드소서’
나는 이번 전시를 세 번을 보았다. '우리들의 이순신' 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統制李公水軍大㨗碑’ 탁본을 모사摸寫할 것이다. (2026.02.05.) (2026.02.19.) (2026.02.27)
역사스페셜 <누가 장군을 쏘았나>
KBS에서 역사스페셜 '누가 장군을 쏘았나'를 방영했다.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200년후 정조는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모두모아 유득공으로 하여금 정리하도록 하여 <이충무공 전서>를 저술하였다. 여기에 이순신은 조총의 유탄에 맞아 서거했다고 쓰여있다. 그리고 이순신묘소에 이 비석을 세웠다. (2026.03.08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