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by 최원돈

아! 우리 강산이여!

-금요일은 나 혼자 국중박 간다-(6)

최원돈


겸재 정선, 아! 우리 강산이여!


“아름답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산수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겸재 정선(1676-1759)은 우리 강산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이 땅을 가장 열성적으로 담아낸 화가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겸재 정선 탄생 350주 년을 맞아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독창적인 화장으로 담아낸 그의 대표작을 선보인다. 겸재 정선은 평생 붓을 놓지 않고 전국을 두루 여행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다. 그는 경치를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기는데 머물지 않고, 개성 넘치는 해석과 필법을 더해 이 땅의 참모습을 담은 진경산수를 완성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대와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기념비적 초년작인 <신묘년풍악도첩>과 노년의 명작인 '박연폭포' 등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정선의 작품들은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정선의 금강산 여행


“1711년 늦가을, 36세의 정선은 여러 벗과 함께 금강산을 두루 여행하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이미 그린 13점의 그림을 모아 화첩으로 엮은 것이 <신묘년풍악도첩>이다. 본래 그림과 시를 함께 담은 서화 합첩이었으나, 지금 시는 전하지 않고 나중에 쏜 발문만 남아 있다. 이 화첩은 현재 전하는 정선의 산수화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그 만의 진경산수화가 형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금강산의 뛰어난 경치가 화면에 녹아있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정선은 금강산을 그린 명작을 많이 남겼다.”



<신묘년 풍악도첩>



단발령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풍경을 담았다. 화면 아래에는 붓을 눕혀 쌀알처럼 찍은 미점으로 흙산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위쪽에는 힘 있는 붓질로 바위산을 그려 두 산의 성격을 뚜렷하게 대비시켰다. 그 사이는 구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하나의 웅대한 풍경을 완성하였다. 단발령 중턱에는 여행객들이 가마에서 내려 금강산을 바라보는 모습을 더해 현장감을 전한다. ”



장안사

“내 금강산 입구에 자리한 장안사와 주변 풍경을 그렸다. 장안사 앞에는 무지개다리인 비홍교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금강산에 들어선다고 여겼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해 비홍교를 크게 그려 금강산 유람에서 중요한 관문임을 나타냈다. 비홍교는 1723년 이전까지 존재했으나, 정선은 이후에도 장안사 그림에 비흥교를 계속 그려 넣어 그 상징성을 강조하였다.”



보덕굴

“장안사를 지나면 만폭동 물이 모여 흐르는 벽하담을 만난다. 벽하담 오른쪽 높은 절벽에는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보덕굴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곳은 금강산 유람 중에서도 마음을 닦고 자신을 돌아보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벽하담 왼편으로 금강대 등이 차례로 이어지고, 그 뒤로 뾰족한 바위의 험준한 산세가 펼쳐진다. 정선은 여러 경관을 좁은 화면에 배치하여 여행자가 실제로 걸으며 마주했을 풍경을 그림 속에 충실히 담아내고자 하였다.”



백천교

“금강산 유람은 장안사 앞 비홍교에서 시작해 외금강 통암 아래 백천교에서 마무리된다. 백천교는 외금강 산 여행의 끝이자 해금강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강가에는 경치를 바라보는 여행객들과 그들이 타고 온 가마와 이를 메고 오느라 지친 승려들이 모여 있고, 강 건너편에는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시종과 말들이 시선을 끈다. 구름과 안개에 싸인 울창한 나무는 미점을 옆으로 길게 늘여 찍는 미가법으로 표현해 깊은 산중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문암의 해돋이

해금강에 있는 문암에서 해돋이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문암의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네 명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있고,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반쯤 떠오른다. 떠오르는 해와 그 빛에 물들어가는 하늘을 선염법으로 은은하게 표현하였다.




옹천

“독 벼랑이라 불리는 옹천의 험준한 풍경을 담았다. 붓을 쓸어내리듯 먹을 칠해 바위의 무겁고 단단한 질감을 살리고,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작은 점을 찍어 돌층계를 표현했다. 벼랑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군데군데 작게 배치해 거친 자연 속에서 조심스럽게 길을 걷는 모습을 실감 나게 전한다. 벼랑 끝 모퉁이에는 나귀 뒷다리와 꼬리를 그려 감상의 재미를 더한다.”



신영이 쓴 발문(발문 글씨)

“왼쪽의 비단에 그린 풍악도 13폭은 나의 고조부 백석공께서 만년에 금강산의 명승지를 유람하시면서. 겸재 정선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면 단락에 따라 품평하였고, 또 당시 시를 짓는 제공들과 수찬 한 것이다. 내가 일고여덟 살 때부터 책 상자 속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는 기록을 보았는데, 시는 시로만 보고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았기에 시와 그림을 함께 감상해야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다시 열람해 보니.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와 그림을 합쳐 장정하려고 하였으나. 백석공의 시평과 벗들이 화답한 작품들은 <수창록>에 수록되어 지금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별지에 베껴 적어서 원래 그림의 아래에 붙이고. 그 제시와 화평은 해당 화폭의 좌우에 옮겨 적어 함께 관람하기 편하게 하였다. 아! 삼가 세월을 헤아려보니, 그 일은 두 번 앞선 신묘년(1711)에 있었고 97년이 흘렸다. 지금은 순조 정묘년(1807) 음력 7월 상순이다.”



<금강산 여정>



겸재 정선이 1711년 36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간 금강산의 여정이다. 피금정에서 시중대에 이른다.


-피금정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출발해 금강산에 이르려면 강원도 금성(북한 행정구역) 남대천 옆에 있는 피금정을 지난다.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라는 뜻의 피금정‘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여러 화가가 그림으로 남겼다.


-단발령

금강산 여행이 시작되는 고개이다. 이곳에서 바라본 금강산이 너무나 장엄하고 황홀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는 뜻에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장안사

금강산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어 내금강 유람의 출발지로 유명한 사찰이다. 장안사 입구의 무지개다리인 비홍교는 1723년에 장마로 유실되었다,


-보덕굴

유점사에서 송림사로 넘어가는 고개 북쪽에 있는 불정대는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이자 금강산 4대 폭포 중 하나인 십이폭포를 볼 수 있는 명소이다.


-불정대

유점사에서 송림사로 넘어가는 고기 북쪽에 있는 불정대는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이자 십이폭포를 볼 수 있다.


-백천교

유점사 아래 있었다는 백천교는 내금강과 외금강 여행을 마치고 나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나귀로 갈아타고 해금강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인 유람 경로였다.


-해산정

북한의 강원도 고성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뒤로는 금강산 앞으로는 동해와 남강으로 둘러싸인 절경에 위치해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방문하였다.


-삼일호

북한의 강원도 고성에 있는 호수이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는 사선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신라 화랑 네 명이 이곳 경치에 반해 3일 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고 놀았다는 이야기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


-문암

삼일호 안에 있는 낮은 봉우리로 마치 문짝 같은 큰 돌들의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예로부터 동해안의 일출을 구경하는 데 최고의 장소였다.


-옹천

북한 강원도 고성에서 통천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파른 벼랑길이다. 바다와 가까이 있는 둥근 형태의 절벽으로 파도가 넘실거리고 길이 매우 좁고 험한 곳이었다.


-총석정

북한 강원도 통천 바닷가에 있는 정자이다. 주변에는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부딪혀 여러 가지 모양의 돌기둥을 이룬 주상절리가 있어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중대

북한 강원도 통천 협곡의 시중호 일대에 있던 누대로 동해의 작은 섬들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던 명소였다.



지금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금강산이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의 재개관에 맞추어 ’ 겸재 정선, 아! 우리 강산이여! ‘특별 전시가 열렸다.


나는 <신묘년풍악도첩>부터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어 웅성거리며 감탄을 쏟아낸다.

'어찌 이렇게 작은 화첩에다 금강산을 저토록 세밀하게 그렸을까?'

겸재 정선은 36세의 젊은 나이에 이처럼 완숙한 그림을 그렸다니 놀랍다. 겸재의 그림은 이때부터 진경산수를 그렸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단발령에서 내려다본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구름 속에 아련하다. 멀리 비로봉도 우뚝하다. 그 시절 어떻게 이런 구도를 잡았을까.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구도이다. 겸재는 젊은 나이에 대가의 경지에 올랐던 것일까, 단발령 고개에서 선비들의 절창이 들려오는 듯하다.

비홍교는 구름다리는 장안사 입구에 놓여 있어 이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금강산에 들어선다고 여겼다. 십여 년 후에 큰 물로 없어졌지만, 겸재는 그의 마음속 비홍교는 지울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 실지 풍경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상상의 진경으로 그린 것이리라.

금강대 보덕굴도 백천교도 겸재는 보고 그리는 그림이 아닌 느끼며 그린 그림이다. 백천교 그림에는 유람객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듯하다. 문암에서 해돋이를 바라보는 인물과 수평선 위 반쯤 떠오른 붉은 해와 선염으로 물든 바닷빛은 은은하고 장엄하다. 독 벼랑 웅천의 절벽은 부찰법으로 질감을 살리고, 작은 점을 찍어 돌층계도 표현했다. 벼랑 끝 모퉁이에 나귀 뒷다리와 꼬리까지 그려냈다.


신영의 방문을 읽으니 이 화첩이 더욱 살아난다. 이 글은 어릴 적 고조부에 대한 그리움으로 베여있다.

"시는 시로만 보고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았기에, 시와 그림을 함께 감상해야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다시 보니,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첩을 만든 동기이자 이유이다. 명문이다. 이 말 한마디로 ’ 서화동원‘이라는 말을 다한다. 신영이 화첩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이 그림이 오늘까지 전해져 왔을까.


피금정에서 시중대까지의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출발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이다.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곳이다. 굽이굽이 열두 굽이를 돌아 금강산은 금성 남대천에서 통천 해금강에 이르는 명소이다. 옛 사진과 글을 통해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다.

금강산은 언젠가는 가보아야 할 우리들의 조국 강산이 아닐 수가 없다.


<송강 정철의 송강가사>



<관동별곡>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며 금강산을 노래했다. 연추문에서 임금을 찾아뵙고 여주 섬강을 지나 원주 치악산을 돌아 춘천 소양강을 지나 화천을 너머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노래한 관동별곡 금강산으로 들어가 본다.


<강호에 병이깊어>


“감영이 무사하고 절기는 삼월인데

화천 시냇길이 금강산에 뻗어 있다.

길 차림 잘 갖추고 돌길에 막대 짚어 백천동을 곁에 두고 만폭동이 들어가니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섞여 돌며 뿜는 소리 십 리에 잦아드니

들을 때는 우레 더니 보니까 눈이로다.


금강대 맨 위층에 학 두루미 새끼 치니 봄바람 옥저 소리에 첫잠을 깨웠는가.

나래 펼친 저 두루미 하늘 높이 솟아 떠서 서호의 옛 주인을 반겨서 넘노는 듯

소향로 대향로 눈 아래 굽어보고

정양사 진헐대에 다시 올라 않으니,

금강산의 참모습이 여기서 다 뵈누나.

아아 조물주의 그 재간 놀랍기도 하구나. 날거든 뛰지 말고 섰거든. 솟지나 말지. 연꽃을 꽃 있는 듯 백옥을 묶었는 듯

동해를 박치는듯 북극을 되었는 듯

높을시고 망고대 외롭구나.

혈망봉이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리는가. 천만년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누나.

아아 너로구나 너 같은 이 또 있는가.


개심대에 다시 올라 중량 성 바라보며

일만 이천 봉을 똑똑히 헤어보니

봉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든 깨끗지 말고 깨끗거든 맑지 말지!

저 기운 흩어 내어 인걸을 만들고

저 그 모양 그지없고 생김새 하 많구나. 하늘땅이 생겨날 때 저절로 되었건만

이제 와 보게 되니 유정하기 그지없네.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본 이 누구인가

동산과 태산 어느 것이 더 높던가.

노나라 좁은 줄도 우리는 모르거든.

넓고도 넓은 천하 어찌하여 적다 했나.

아아 저 경계를 어이하면 알 것인가.

오르지 못하거니 내려감이 기이할까.


원통골로 좁은 길로 사자 병을 찾아가니

그 앞에 너럭바위 화룡소가 되었구나.

천 년 묵은 늙은 용이 굽이굽이 서려 있어 밤낮으로 흘러내려 먼바다에 이었으니

바람 구름 언제 얻어 단비를 내리려나.

음지 비탈 시든 풀을 다 살려 내다오.


마하연 묘길상에 안문재 넘어가서

외나무 썩은 다리 불정대에 올라 보니

천 길 절벽을 반공중에 세워 두고

은하수 큰 굽이를 마디마디 베어 내어

실같이 풀어헤쳐 삼베같이 걸었으니, 책에서는 열두 굽이 내 보기엔 여럿이라. 이태백이 이제 있어 고쳐 의논하게 되면 여산이 여기보다 낮단 말 못 하리라.


산중을 매양 보라 동해로 가지꾸나.

교자 타고 천천히 산영루에 올라가니

맑은 시내 우는 새는 이별을 한하는 듯 깃발을 떨치니 오색이 넘노는 듯

풍악을 울리니 바다 구름 다 걷는 듯 모랫길에 익은 말이 취한 신선 비켜 싣고 바다를 곁에 두고 해당화밭 들어가니 갈매기야 날지 말라 네 벗인 줄 어찌 아느냐.


금난굴 돌아들어 총석정에 올라가니

백옥루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 있구나. 공수의 솜씨인가 귀신이 다듬었나.

구태여 여섯 면은 무엇을 뜻하는고.


절창이다. 누가 말했던가 '시와 그림은 같은 뿌리'라고. 신영의 발문이 그냥 쓴 글이 아니로다.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네',

오늘 겸재의 풍악 화첩과 관동별곡을 읽게 되니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깊은 뜻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겸재 정선의 ’ 신묘년 풍악화첩’을 통하여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하고, 송강의 ’ 관동별곡‘을 통하여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과연 이런 그림이나 글을 쓸 수나 있을까. (2026. 03. 06)



<북녘 산하 금강산>

<이은상의 조국강산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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