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1948년 제헌의회 때 도입됐습니다. 1964년 당시 야당 초선 의원이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첫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인물로 꼽힙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통과를 필리버스터로 막아냈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부당한 구속동의안에 맞서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함으로써 임시국회 회기를 마감, 구속동의안을 무산시켰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은 국회 최장 시간 발언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인 1973년 발언시간을 45분으로 제한하면서 폐지됐습니다. 그러다 18대 국회 임기 말인 2012년 5월 2일 '국회선진화법'이라는 이름의 국회법 개정안에 포함돼 통과되면서 39년 만에 부활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주로 소수 정당이 다수 정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합법적 수단으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행위를 뜻합니다.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단독 의사진행을 막기 위한 소수당 최후의 보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기록은 김 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뿐입니다. 대체로 여론 환기나 대화와 타협, 다수당 독주 제어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2019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 2020년 국가정보원법 개정안·대북전단금지법 등에 반대해 필리버스터에 나섰습니다. 국민의힘은 2022년 검찰 직접수사 축소법, 2024년 채상병특검법·노란봉투법·민생회복지원금특별법, 올해 방송3법·노란봉투법 등에 필리버스터를 했습니다. 그러나 법안들은 통과가 지연됐을 뿐 부결된 적은 없습니다. 그 대신 텅 빈 본회의장에서의 독백 연설이나, 졸고 있는 의원의 모습만 포착됐죠.
이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제한법' 처리를 예고했습니다. 현행 국회법에 따르면 본회의 출석 의원이 정족수 미달이면 국회의장은 회의를 중단하거나 산회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필리버스터는 그동안 이 규정에서 예외였습니다. 개정안은 예외 조항을 없애고 필리버스터 진행 때 본회의 정족수인 재적의원 5분의 1, 즉 60명이 출석하지 않으면 국회의장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습니다. 현행법에서도 24시간이 지나면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시키고 법안을 표결에 부칠 수 있지만, 이를 더 앞당기려고 했죠.
민주당은 이 법안을 지난 3일 국회 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처리했습니다. 당초 민주당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9일 필리버스터 제한법을 처리한 뒤, 10일부터 열리는 12월 임시국회에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특별법 등 쟁점 법안을 순차적으로 처리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돌연 필리버스터 제한법의 본회의 처리 계획을 뒤로 미뤘습니다.
국민의힘이 "소수 야당의 유일한 저항 수단마저 무력화하는 법"이라고 반발하고, 범여권인 조국혁신당에서도 "필리버스터는 소수 의견을 보호하고 숙의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제도적 장치"라면서 법안 개정에 반대하자 속도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