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뜸방과 '눈먼 자들의 도시'

by 연산동 이자까야

혹시 영화 '타임 투 킬'(1996년)을 본 적 있습니까? 산드라 블록, 사무엘 잭슨, 매튜 맥커너히, 케빈 스페이시 등 아카데미 수상자들이 총출동한 영화입니다. 존 그리샴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마지막 장면이 압권입니다. 법정 드라마답게 변호사로 출연한 매튜 맥커너히가 배심원들 앞에서 상상도 못할 마지막 변론을 펼칩니다.


'타임 투 킬'의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고 상상하겠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묘사해 보겠습니다. 수백 개의 쑥뜸, 뜸을 뜨는 동안 누워있을 침대, 좌욕기, 많은 뜸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기기, 환기시설, 소독 용품 등이 즐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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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일까요? 정답은 한의원이 아닙니다. 부산 북구청사 내 북구청장의 '쑥뜸방'입니다.


이미 쑥뜸방 관련 기사를 보셨을 겁니다. 혹시 읽지 않은 분이 계실까 봐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국제신문 취재진이 최근 북구청사 내에 설치된 구청장 전용 쑥뜸방의 존재를 밝혀냈습니다. 쑥뜸방은 당직 직원 숙직실 맞은편에 약 15㎡ 규모의 공간에 조성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입구에 잠금 장치까지 설치됐습니다. 내부 모습은 이미 소개해 드렸습니다. 국제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쑥뜸방'은 곧바로 철거됐습니다. 예전 북구청사의 한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기사의 반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꽤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모두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구청사 내에 어떻게 쑥뜸방을 설치할 생각을 했을까요? 쑥 냄새가 강하다는 건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구청사 내부에서 쑥뜸을 한다면 냄새는 어떻게 될까요?


예전 '도라지'라는 담배가 있었습니다. 흡연자들에겐 일명 '약담배'로 통했습니다. '도라지' 담배의 특징은 어마어마한 냄새였습니다. 당시 '도라지'를 피면 반경 100m 이내 사람은 모두 알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습니다. 담배 냄새가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쑥 냄새라뇨? 그렇게 냄새가 강한데 어떻게 공공시설인 구청사 내에서 쑥뜸을 할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구청을 이끄는 구청장의 건강은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공시설에 구청장의 건강을 위해 쑥뜸방을 설치한 건 법을 떠나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공공시설은 공공재입니다. 구청장의 사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직원들은 몰랐을까요? 만약, 알았다면 왜 철거되지 않았을까요?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추정만 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4일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애초 쑥뜸방은 6개월 전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6개월이 아니라 3년 전에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주민들이 나섰습니다. 부산시와 감사원에 주민감사를 청구했습니다. 주민 150명 이상이 동의 서명을 하면 부산시가 감사에 나설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중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습니다. 왜 쑥뜸방 기사를 보면서 자꾸 그 소설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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