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문명 파괴' 발언, 적절한가

by 연산동 이자까야

미국과 이란의 중동전쟁이 개전 38일 만에 전격적으로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협상 시한인 미 동부시간 7일 오후 8시, 한국시간 8일 오전 9시를 불과 88분 앞두고 미국과 이란은 파키스탄이 제안한 '2주 휴전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포성이 잠시 멈추면서 전 세계가 안도합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꽉 막혀버린 에너지 수급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길 바라는 눈치입니다.


아직 안심하기 이릅니다. 말 그대로 '2주 휴전'입니다. '종전'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해협의 운항 정상화와 이란의 핵무기 보유 금지 등 핵심 쟁점을 놓고 미국과 이란의 입장 차가 커 협상이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합니다. 여기선 전쟁 종식, 세계 경제 향방, 에너지 수급 해소 같은 거대 담론 대신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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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시한을 약 12시간 앞두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오늘 밤 한 문명(civilization) 전체가 사라져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이란은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기로 결정한 적 없는 수단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이란이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그 수단을 실제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의 강도 높은 경고 메시지가 이어지면서 미국이 핵 사용을 고려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백악관은 부인했습니다.


물론 전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 말에 담긴 의미를 대략 짐작합니다. 이란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려는 협박 또는 압박입니다. 상대에게 겁을 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극단적인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그동안 전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말과 행동을 숱하게 접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국 이익만을 위해 상대가 우방국이든, 적대국이든 가리지 않고 협박 또는 압박을 가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국제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질서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무너졌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선을 세게 넘어버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 문명 전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한 문명=이란'이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말의 뜻을 곰곰이 새겨보면 섬뜩합니다. 아무리 협박이나 압박이라고 해도 너무 많이 갔습니다. 이런 표현이 처음도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슷한 맥락의 말을 이전에도 했습니다. 지난 1일 대국민 연설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중동전쟁에서 누구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미국이 세계 최강 국가라고 해도 함부로 상대 국가의 문명을 사라지게 한다거나,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식의 발언은 지나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협박이나 압박이란 걸 충분히 알고 있지만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선 고민할 여지가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이란은 한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아케메네스와 사산 왕조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아울러 이란은 중동에 있고 이슬람권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아랍 국가와 민족, 언어, 역사가 다릅니다. 이란은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고 '파르시어(페르시아어)'라는 고유의 언어를 구사합니다.


이란의 문명은 세계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런 유산이 인간의 손에 의해 없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문제를 앞세워 협박한다는 건 세계 최강 미국답지 않습니다. 이미 인류는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을 거치면서 문화유산 보존과 파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서 국제 질서에선 정의나 법보다 힘이 우선이란 걸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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