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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산재법', 이거 아나?

by 연산동 이자까야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라노는 이번 주 '이거 아나'에서 소개할 시사상식 용어를 '태아산재법'으로 정했어요. 임신 중 노출된 유해한 환경 탓에 나중에 태어난 아이가 고통받게 된다면 어떨까요? 임신 중 당한 산업재해 피해는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기는 일이에요. 우리나라에는 이럴 때를 대비해 '태아산재법'이라는 법이 있는데요. 그럼에도 태아 산재가 쉽게 인정되지 않고 있어요.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태아산재법'이 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라노가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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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산재법'은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가 업무상 유해 환경에 노출돼 자녀가 선천성 질환을 갖고 태어나거나 사망한 때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고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말합니다. 태아산재법은 2021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다음 해 1월 11일 공포됐습니다. 법 시행은 1월 12일부터 됐죠.


이 법은 '제주의료원 태아 산재 사건'으로 생겨났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2009년 제주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년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하고,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했습니다. 한 곳에서 일정 시기에 문제가 발생하자 서울대 산학협력단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역학조사를 진행합니다. 당시 역학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주된 유해 요인은 의약품 등 화학물질 노출, 환자 폭언·성희롱으로 인한 스트레스, 인력 부족과 교대 근무로 인한 육체적 부담 등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간호사들은 생식계에 장애를 유발하는 생식독성 물질을 상시 다뤘고, 여기에는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임산부와 태아에게 유해하다고 규정했던 약물도 포함됐습니다. 간호사들은 취급 주의사항에 대한 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채 환기 시설이 없는 곳에서 보호장비 없이 매일 200여 정의 약을 분쇄해야 했습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제주지사에 요양급여를 청구했지만 부지급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후 긴 법정 다툼이 이어졌고 2020년 4월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태아 산재를 인정했습니다. '태아산재법'은 이렇게 만들어졌죠.


태아산재법은 하나의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임신 중인 근로자가 위험한 환경에 노출돼 자녀가 선천성 질병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면 산재보험으로 '국가가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안이 마련된 후 근로복지공단에서 태아 산재를 인정한 사례는 한 건도 없습니다. 긴 역학조사, 까다로운 인정 요건 탓에 태아산재법은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됐죠.


태아 산재가 적용되면 자녀는 요양급여(치료비), 장해급여, 직업재활급여 등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재 인정 절차는 지지부진하게 늘어지고 있습니다.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역학조사부터 오래 걸립니다. 원칙상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180일 내에 역학조사를 심의·의결해야 하지만 내부 지침이라 강제성이 없습니다. 게다가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태아산재법 시행령'을 만들면서 태아에게 영향을 주는 유해인자를 17개로 한정했습니다. 이는 태아에게 위험하다고 알려진 화학물질 1484개의 1% 수준이죠.


2019년에 나온 고용부 연구용역 보고서에는 유해 물질을 다루는 여성 근로자를 10만6669명으로 추산했습니다. 태아에게 치명적인 생식독성 물질을 취급하는 40세 이하 여성 근로자는 3929명에 달했죠. 하지만 현재까지 공단에 접수된 태아 산재는 10건에 그칩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태아산재법, 지금도 산재 인정을 기다리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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