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시민들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열열하고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러고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항상 사랑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라노는 이번 주 와이라노를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제작해 봤습니다. 라노는 영화를 사랑하는 노루로서 항상 영화와 관련된 뉴스레터를 발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여건이 되지 않아 늘 고사해왔습니다. 이번 주엔 영화 한 편을 리뷰할 좋은 기회가 생겨 이렇게 색다른 와이라노로 여러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라노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뺀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거의 매일 출석 도장을 찍으며 영화도 많이 관람하고, 굿즈도 사면서 영화제의 분위기를 한껏 즐겼죠. 라노가 몸담고 살아가는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건 참 벅차오르는 일입니다. '영화 도시'라는 타이틀도 참 마음에 들고요.
사실 부산에 사는 시민들은 BIFF를 그저 '해마다 개최되는 국내 영화제' '부산의 축제' 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라노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죠. 하지만 이제까지 만난 영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공통적으로 BIFF는 '큰 규모의 대형 영화제' '국제적인 행사'라고 평가합니다.
국제신문이 제작한 네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는 BIFF를 탄생시키고 성장시켜 마침내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길러낸 김동호 전 BIFF 집행위원장의 삶을 담았습니다. '영화 청년, 동호'는 지난 5월 칸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면서 세계 최초로 상영된 이후, 올해 BIFF 특별 초청으로 아시아에서 처음 공개됐습니다. 오늘 라노는 한국 영화의 기반을 다진 김 전 위원장의 영화 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김 전 위원장의 '영화 인생'은 스물넷의 나이에 공보부에 입사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공보부에서 일하는 동안 예술의전당, 국립현대미술관, 국악당 등 많은 문화시설을 기획하고 건설했죠. 정권이 바뀐 1988년에는 공직생활을 접고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공직자 출신이 영화진흥공사 사장 자리를 꿰차자 ‘낙하산 인사’라며 영화계에서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김 전 위원장은 영화계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 당시 제작됐던 한국 영화를 챙겨보고,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영화를 이해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영화인들에게 맞는 정책을 펴려면 영화인이 돼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죠.
‘한국 영화가 살 길은 해외시장에 있다’고 생각한 김 전 위원장은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는 영화진흥공사 부임 기간 동안 한국 영화의 해외 진출을 위해 전 세계 영화 시장을 노크했죠. '아다다' '아제아제바라아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등의 한국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진출하자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영화가 뚫기 어려웠던 국제 배급의 좁은 통로를 열기 시작합니다.
1993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김 전 위원장은 영화 심의를 하는 기관의 장으로써 갈등을 느끼지만, 영화 진흥을 위하는 입장에서 심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노출 장면이 나오는 '크라잉 게임'을 심의 내주는 파격적인 결정을 단행하게 되죠.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로 체제가 바뀌자 묶여있던 소련의 고전 영화를 해금시키기도 합니다. '몽타주 이론'으로 영화 예술의 혁명을 일으킨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을 허가하는 등 영화사에서 손꼽히게 중요한 영화를 국내 개봉할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쇼군 마에다' '네츄럴 본 킬러'를 심의 통과시키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한국 영화관에 일본 사무라이가 나오는 '쇼균 마에다'가 걸린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반발했고, 폭력 장면이 나오는 '네츄럴 본 킬러'를 허가해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 됩니다. 이 일로 인해 김 전 위원장은 영상물등급위원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화려한 백수'가 되죠.
1995년 30여 년의 공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김 전 위원장에게 젊은 청년들이 찾아와 "부산에서 개최하는 영화제를 함께 만들자"며 손을 내밉니다. 그 손을 붙잡은 김 전 위원장은 59세의 나이로 부산에 와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죠. 부산에서 첫 국제영화제를 개최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 그는 영화의 바다를 항해하며 선장 역할을 할 집행위원장 자리를 맡아 영화제를 개최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됩니다.
BIFF가 부산에서 열리기 전, 부산은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오명을 영화제가 불식시켜줄 수 있다고 믿었죠. 부산에서 제1회 국제영화제가 열린다는 보도가 나오자 기대하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가 뭐지?' '그런 걸 왜 하지?'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습니다.
반신반의하며 개최한 제1회 BIFF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야외 상영을 시작한 것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남포동에서 상영하는 영화 예매율이 자연스럽게 올라갔고, 결국 18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야말로 '초대박'을 친 것. 부산 문화의 전기가 되는 순간이었죠.
첫 항해를 순조롭게 끝낸 BIFF는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29회까지 이어졌습니다. 부산은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는 것을 넘어서 '영화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게 됐죠. 감독도, 배우도, 스태프도 아니지만 김 전 위원장이 '영화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의 인생은 영화를 빼고서는 논할 수 없는 '영화인' 그 자체입니다.
지난 6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영화 청년, 동호'의 GV(관객과 영화 출연진·제작진이 나누는 대화)가 열렸습니다. 김 전 위원장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며 자신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한 소감을 전했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저 자신이 앞장서) 3년 동안 기획하고 예산을 확보해 건설한 영화의전당 무대에 이렇게 앉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데,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