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 우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 두 개념이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두 개념은 자주 대립한다. 민주주의의 두 기둥인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대립할 수 있을까? 현대에는 자유와 평등의 대립이 자주 이슈가 된다. 그러나 많은 논의는 단어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아서 흩뿌려진다. 과연 민주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와 평등은 무엇일까?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대립에 관한 논의에서 두 개념은 명확히 정의되고 있을까?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개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근대 이전의 전체 정치에서 시민 정치로의 변화이다. 계몽과 시민혁명으로 특정 집단에게만 있었던 자유와 평등이 모든 인간의 인권으로서 자리 잡았다. 1948년 UN은 세계시민인권 선언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것으로 정의했다.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자유와 평등도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토대로 민주주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가지며, 판단들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자유이고, ‘판단들의 동등한 지위’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평등을 의미한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자유와 평등은 충돌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합리적 판단들은 동등한 지위를 가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의 자유와 평등 개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치적 의미라는 것이고, 하나는 자유와 평등의 적용 범위가 특정 집단이 아니라 전체 집단이라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주목해야할 부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적용 범위가 전체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자유/평등과 다른 사람의 자유/평등이 대립한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 개인적인 자유와 평등이라면 충분히 대립할 수 있지만, 자유와 평등이 인간 전체의 자유와 평등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이 민주주의에서의 자유와 평등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와 평등의 대립은 무엇일까? 우리가 자유와 평등의 대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집단/개인과 다른 집단/개인의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따지면, 자유와 평등의 대립뿐만 아니라 자유와 자유, 평등과 평등의 대립도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현대에 성평등에 관한 논의에서 여성차별에 대립하여 역차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평등과 평등의 대립이다.1) 모든 자유와 평등의 대립은 사실을 따지면,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 물론 어떤 이해관계가 정의로운지는 따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논의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
위에서 민주주의에서의 자유와 평등은 이론적으로 대립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이해관계의 충돌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현실 정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해서 A후보가 51%, B후보가 49%라는 결과가 나오면, A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의 판단을 동등하게 존중해도 결국 49%의 판단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을 51%만큼은 A후보가 49%만큼은 B후보가 나눠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와 평등은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의 판단을 동등하게 반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자유와 평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실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자유와 평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는 형식적 민주주의이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법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만에 하나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려는 사람이 있어도 형식 덕분에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있다. 최근에 계엄이 있었지만, 국회에서 계엄해제가 가결되어 계엄이 하루도 안 되어 해제되었다. 이는 민주주의가 법으로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가능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면은 이와 같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한다.
두 번째 방식은 태도로서의 민주주의이다. 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핵심이며, 현대 사회가 잃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와 평등은 모든 사람의 판단을 현실적으로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적 자유와 평등은 일종의 태도이다. 타인의 판단이 합리적 판단이라고 인정하고, 나의 판단과 이론적으로 동등한 판단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가 되려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의 판단이 합리적 판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로서의 민주주의이다. 나아가 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에는 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 다른 판단에 대해서 합리적일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사람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모든 사람의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실제로는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 자신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객관적 합리성이 아니라 주관적 합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의 이유 때문에 어떤 판단을 한다. 민주주의는 그러한 판단을 한 사람들의 나름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최근에 오늘날 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사례가 있다. 계엄 이후 우경화된 소위 ‘이대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판단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많은 평가는 판단에 대한 객관적 평가이기보다 ‘이대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이다. 그 집단을 이상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처럼 특정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순간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는 사실상 잃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판단에 대해 주관적 합리성을 분석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우리의 태도로,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투표와 대통령제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고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전 국민이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은 법을 튼튼히 하고, 체제를 단단히 만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부터 타인을 합리적 판단의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타인의 판단이 객관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합리적일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한다. 거의 모든 판단에서 객관적 합리성은 찾지 못할 수 있어도 최소한 주관적 합리성은 발견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민주화 운동은 계속되었다. 앞 세대의 민주화 운동은 군사정권의 독제에 맞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시위를 통하여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앞으로의 민주화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부터 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현대의 민주화 운동이 될 것이다.
1) 물론 성평등에 관해서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은지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한다.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현실에서 자유와 자유, 평등과 평등의 대립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대립은 집단과 집단의 이해관계의 대립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