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9, 예습 vs 선행학습

Triacastela에서 Sarria까지

by Sal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자주 온다더니 ‘이제부터 갈리시아입니다’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이정표를 넘을 때부터 비가 계속 온다.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져서 출발은 엄두도 못 내고 허허허 웃음만 짓고 있다. 등산화에 들어오는 물을 막기 위해 비닐로 등산화를 싸는 폴란드에서 온 야렉을 보고 나도 따라서 꼼수를 부려보고 9시가 되어서야 길을 나선다. 아자자!



오늘은 걸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으니 좀 낫네". 아침부터 태풍급의 바람이 비와 함께 콜라보를 하고 있다. 내 눈은 진흙탕 길에서 그나마 물 없는 부분을 찾아서 밟으려고 길바닥을 실시간으로 스캔하느라 바쁘고 머리는 전방 10미터 정도까지 어느 루트를 골라야 신발이 젖지 않을지를 계산하느라 바쁘다. 그 와중에 가끔씩 돌풍이 불어와 10kg이 넘는 배낭을 멘 내 몸을 계속 흔들어 대니 중심 잡기도 쉽지 않다. 바람이 심할 때에는 마치 나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은 여자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사정없이 풀스윙으로 내 왼쪽 뺨을 후려치는 기분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여자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적이 있을까?


나는 스페인 도착하면 사려고 했던 휴대폰 유심을 사지 않았다. 처음에는 알베르게에 일단 들어가면 녹초가 되어 도저히 다시 밖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머릿속에 씻고 잔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상황이 그러하니 나중에 팜플로냐나 부르고스 같은 대도시에 가면 사야지 했는데 역시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냥 넘어가버렸고 그 후에는 걷다 보니 딱히 유심카드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냥 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아침에 알베르게를 떠난 후에는 식당이나 알베르게에 들어가야만 인터넷 연결이 되었다. 일종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미 디지털 디톡스[1] 여행이 된 셈이다. 물론 조금 불편하다. 길 가다 궁금한 점이 있어도 찾아볼 수 없고, 스페인어 번역도 돌려볼 수 없고, 저 성당이 언제 생겼고, 이 마을이 뭐가 유명한지 등등의 정보도 알 수 없다. 어떤 알베르게에는 와이파이 시설이 아예 없는 곳도 있고, 있더라도 간신히 출입구나 로비 근처에서만 연결되는 곳도 있어서 아이들과 연락을 하려면 로비까지 나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내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유튜브를 즐길 수 있다면 그곳은 매우 좋은 알베르게인 셈이다. 덕분에 여기에서 나는 한 번 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보에 매우 둔감한 편이 되어버렸다. ‘디지털 디톡스’는 디지털 단식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러면 나는 ‘간헐적 디지털 단식’을 한 셈이다.


오늘은 인터넷 일기예보 사이트 세 곳을 매일 체크하시는 분을 만났다. 혹시 모르니까 여러 개의 예보사이트를 확인해서 대비한다고 한다. 그분이 앞으로 며칠 동안의 날씨를 얘기해 주시는데 날마다 비라고 한다. 오랜만에 또 토비가 나타난 것 같다. 그런데 배낭을 메고 문을 나서기 전에서야 바깥에 비가 오는지 확인하고 비가 오면 그제서야 우의를 꺼내 입는 우리에게 일주일 예보는 엄청난 사치 같다. 내가 너무 근시안적인가?


여행 갈 곳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난 ‘예습’ 정도의 공부가 적당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내가 아닌 남이 사는 곳을 방문하는 것이고, 지인 방문이나 업무 출장 등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우리 동네와 남의 동네의 ‘차이’를 경험하고 즐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싶다.


남의 동네를 가는데, 약간의 사전 지식은 필요하겠지만, 남의 동네 사람보다 더 많이 공부해서 남의 동네 사람을 가르칠 정도가 된다면 그 동네에 갈 필요가 있을까? 이미 다 아는데 그 동네에 가서 과연 재미가 있을까? 예의를 지킬 정도의 준비,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을 정도의 사전 조사는 필요하겠지만, 그 이상의 공부, 시쳇말로 ‘정보’는 여행의 목적을 희석시키는 정도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영화보기 전에 마지막에 누가 죽고 사는지를 알면 그 영화가 재미있을까? 많은 영화와 드라마처럼 주인공들이 아주 아주 우연히 ‘쨘’ 만나야지 우리가 ‘와~’하는 것처럼 그런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예상치 못한 실수와 우연이 바로 여행을 재미있고 두고두고 다시 기억나게 만드는 부분이다.


약간의 ‘예습’이 아닌 지나친 ‘선행학습’은 학교공부에서의 지나친 선행학습과 마찬가지로 여행에서도 여러 가지 부작용을 초래한다. 일단 여행을 또 하나의 학습으로 만든다. 미리 요점정리를 하는 것처럼, 매일의 To-do list를 만들고 여행 내내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복습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패키지여행이 아닌 자유여행인데 별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이곳과 저곳을 가봐야 하고 저기 맛집에서 꼭 무엇을 먹어야 하고…. 모두 ‘~~~해야 하는’ 일들이다. 정작 걷다가 문득 문득 생기는 ‘~~하고 싶은’ 일은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부족해서 못하는 것 같다.


또 선행학습을 많이 하신 분들의 특징 중 하나는 만나면 설명을 잘해준다. 너튜브를 라이브로 보는 듯하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고, 여기에 가면 꼭 ‘뭐뭐뭐’를 해야 하고, 여기에 덤으로 한국 관련 ‘꿀’ 팁은 빼놓을 수 없다. 여기 가면 한국요리를 먹을 수 있고 저기에 가면 한국라면을 살 수 있고. 그리고 여행을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팁도 알려주신다. 동키서비스도 알려주시고, 어디 알베르게가 가성비가 좋다. 어디 길은 지루하니 패스하고, 어느 구간은 걷기에 좋지 않으니 버스를 타는 게 좋다 등등. 염려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내 생각에는 한국 맛집은 한국이 더 맛있을 것 같고, 무슨 기준으로 어느 구간이 좋다 나쁘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든 길은 힘드니까 기억에 남고, 지루한 길은 지루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각종 맛집들이 즐비하고 온갖 재미있는 방들로 둘러싸인 절대로 지루할 일이 없는 ‘Never-boring’ 세상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 재미없고 발톱까지 빠질 정도로 힘들고 식당에 가면 맨날 똑같은 토티야 파타타만 파는 곳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이 굳이 여기 온 이유를 찾는다고 하면 아마도 이곳에 있다가 그 ‘네지상’(네버 지루한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곳이 훨씬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는 할 것 같다.


오늘의 수업을 다시 요약해 보면 지나친 선행학습을 한 후에 까미노길을 걸으면 유명한 곳은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모두 가보아야 하고, 재미없고 힘든 곳은 버스로 살짝 건너뛰어 버리는 까미노길이 된다. 마치 시험에 나올 법한 부분만 찍어서 공부하는 족집게 공부방식이다. 그런데 공부야 어차피 세상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는 ‘해야 하는/must’ 일이니까 싫더라도 해야 한다지만, 까미노길은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이곳 까미노길에 오는 것 자체가 힘들여서 걸으려고 오는 곳이다. 순례자의 길을 걷겠다고 와서 걷지 않으려고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쓰고, 짐을 지지 않고 편하게 걸으려고 노력을 하는 게 좀 웃프다. 동키나 택시는 정말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사용하는 게 맞지 않을까?


수업 끝!




[1]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란, 디지털(digital)과 해독(detox)의 결합어로, 각종 전자기기와 인터넷, SNS 등에 대한 중독으로부터 벗어나 심신을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