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 안토니오 아저씨

Sarria에서 Portomarin까지

by Sal

오늘은 날씨는 흐리지만 비도 별로 오지 않고 간간히 햇살도 비춘다. 숙소는 어제보다 공간도 넓고. 주방도 넓다. 여전히 주방에는 컵도 수저도 없지만 냄비는 달랑 하나 있다.ㅎ



어제는 아침부터 믿고 싶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쏟아져서 출발을 못하다가 겨우 9시경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덕분에 어제 사리아(Sarria)의 알베르게에도 아주 늦게 도착했다. 저녁까지 비도 오고 추워서 밖에 나가지 않고 냉장고 털기가 아닌 배낭 털기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까미노길 프렌치루트의 후반부에 위치한 알베르게에는 주방시설이라고는 달랑 핫플레이트와 전자레인지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핫플레이트가 있더라도 냄비나 프라이팬이 없으니 조리를 할 수가 없고, 수저도 컵도 접시도 없어서 먹을 수가 없다. 인스턴트 일회용 음식이 아니면 도무지 대안이 없다. 역시나 이곳 사리아의 알베르게도 가용한 설비는 전자레인지와 작은 유리컵 두 개, 아니 어떤 순례자가 먹고 두고 간 다농 요플레 유리용기가 주방 설비의 전부이다. 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티스푼 두 개와 스위스 아미나이프, 먹을 거로는 토마토 페이스트 캔 하나, 삶은 계란 몇 알이다. 어제 마트에서 계란 10개 한판을 사서 먹고 남은 날달걀을 배낭에 넣고 걸을 수는 없으니 한꺼번에 삶아서 그대로 케이스에 담아왔다. 그리고 오는 길에 조금 주운 생밤, 먹다 남은 시리얼이 전부다. 그래도… 한번 해본다.


1. 계란의 종이케이스 뚜껑을 조심스럽게 칼로 자른다. 그릇용기가 없으니 전자레인지에 접시 대용으로 사용해야 한다. 껍질을 살짝 깐 생밤들을 잘라낸 계란케이스 뚜껑에 조심스럽게 올리고 전자레인지에 3분 돌리고 껍질을 까서 삶은 밤을 완성한다.

2. 삶은 달걀도 껍질을 까서 2등분 해놓는다.

3. 토마토 페이스트를 다농 유리용기에 흘리지 않게 조심스레 담아서 (Danone 요플레 용기는 작은 요플레 크기이다. 한마디로 아주 작다.) 전자레인지에 또 3분.

4. 3번의 유리용기 위에 조심스럽게 조각낸 삶은 계란과 삶은 밤 그리고 시리얼을 얹는다.

5. 티스푼으로 삶은 계란 / 시리얼 / 삶은 밤을 토마토소스에 살짝 묻혀 가면서 먹는다. 용기가 작아서 토핑으로 올린 것들을 계속 리필하면서 먹어야 한다.

끝.


KakaoTalk_20250821_212606371.jpg 그런데 삶은 계란일까 아니면 삶은 밤일까?


이렇게 나름의 소꿉놀이를 하던 중인데 주방의 한쪽 옆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시끌벅적하게 대화 중이던 어떤 아저씨 한 명이 우리를 보더니 다짜고짜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캠핑용 코펠을 불쑥 내민다. 푸실리 파스타와 완두콩이 가득한 파스타다. 2인분이 족히 넘는 이 콩 파스타를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태리어와 함께 별로 친절하지도 않은 어투로 ‘~#(%/?-(.?W???’ 하신다. 아 먹으라는 소리인가 보다. 감사! 땡큐! 무챠스 그라시아스!


음식도 감동이지만 사실 우리는 ‘삶은 밤과 시리얼을 곁들인 토마토소스의 삶은 달걀’ 요리를 티스푼보다도 더 작은 스푼으로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대한 양의 파스타를 준다고 해도 상당히 먹기가 힘든 조금 웃긴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우리의 상황을 간파했는지 한입 가득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일회용 수저도 함께 내민다. 이 거대한 양의 파스타를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이런 게 바로 ‘고객 감동’ 아니 ‘순례자 감동’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태리 출신의 안토니오 아저씨는 이틀 전 오세브레이로의 알베르게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주방을 본인 집 주방처럼 사용하면서 요리를 하더니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었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 수혜자가 우리가 된 셈이다. 다시 한번 인생지사 엎치락뒤치락 왔다 갔다 오락가락이다.


오늘 포르토마린(Portomarin)에서는 어제 얼떨결에 과식은 했지만 부실하게 먹은 저녁을 만회하기 위해서 마트에서 냉동피자와 와인 등등을 사서 주방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얼떨결에 앉은 그 자리가 또 안토니오 아저씨였다. 어제는 안토니오 아저씨가 갑자기 쨘! 하고 나타났다가 바로 쌩! 본인 무리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아직 서로 ‘관계’ 성립은 되지 않은 상태였었다. 서로 인사도 나누고 어제의 감사한 마음에 우리의 특허 요리인 ‘전자레인지 3분 밤’도 나눠드리고, 전자레인지에 지금 돌고 있는 냉동피자도 같이 먹으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헐! 또 선수를 뺏겼다. 우리에게 또 빠다(버터) 냄새가 둥실둥실 뭉게뭉게 피어나는 리조또를 한 냄비 들고 걸어온다. 물론 밤도 드리고, 와인도 드리고 피클도 드리고 나중에 깔끔하게 설거지도 해드렸지만 또 잘 얻어먹고 말았다. 피자는 인스턴트라고 싫어하신다.ㅎ (이태리사람이라ㅋ)


푸짐했던 점심 덕분에 와인과 비스킷만으로 가볍게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울랄라!!! 역시나 안토니오 아저씨가 이번에는 우리를 먼저 발견하고 바로 옆에 착석을 하신다. 그리고 오늘의 저녁 메뉴로는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토마토샐러드’를 나눠 주신다. 그리고 까미노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못 먹었던 그 귀한 뽀얀 흰 살과 ‘샛’노~~ 란 노른자의 계란 프라이를 주신다. A가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ㅎ 정말로 ‘부엔 까미노!’이다.


안토니오 아저씨는 코펠과 양념 등 기본적인 조리도구를 들고 다닌다. 그래서 처음 주방에서 봤을 때부터 요리를 많이 해서 주변의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 같았다.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나는 사람이 나쁜지 좋은지는 음식을 나눠주는 것만 가지고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 주변 사람들이 즐겁고 배부르게 되는 것은 내가 증인이니만큼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 사람을 평가할 필요 없이 그 나눠주는 행동만 평가한다면 매우 보람되고 좋은 일인 것 같다. 특히나 주룩주룩 비가 오고 으슬으슬 몸도 춥고 먹을 것을 살 슈퍼도 문을 닫는 일요일에 컵도 그릇도 냄비도 프라이팬도 없는 알베르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동전의 양면처럼 안토니오 아저씨는 주변 사람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덜 좋은 점이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안토니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달린 헤드랜턴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 강렬한 불빛이 마치 등대처럼 침대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닌다. 가끔씩 들리는 목소리도 우렁차다. 우리는 비교적 일찍 일어나는 편이어서 이미 깨어 있으니 괜찮지만 아직 침대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좀 싫어할 것 같다. 도미토리니까 다들 이해하겠지!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서 다시 안토니오 아저씨는 우리가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버터향이 잔뜩 나는 리조또를 냄비를 내민다. 이번에는 아예 우리 것을 미리 남겨두었던 것 같다. 맘마미아! 아무튼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사실 안토니오 아저씨가 리조또 만드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데, 리조또 냄비에 치킨스톡을 콸콸콸 붓더니 거기에 200g 버터의 절반을 넣는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