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1, 늘 빠지는 준비물

Portomarin에서 Palas de Rei까지

by Sal

이곳 갈리시아 지역은 바다와 가까운 만큼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삶은 감자를 곁들인 문어요리(Pulpo de Patata)와 이 지역 갈리시아 산 화이트 와인 Vino Albarino를 먹어보라고 하니, 내일은 문어요리로 유명하다는 멜린데(Melinde) 마을에서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그래도 이 글이 까미노길에 대한 기록인 만큼 아니면 적어도 까미노길을 핑계로 적기 시작한 글인 만큼 까미노길을 걷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하나는 적어야 될 것 같다. 그래서 일단은 대부분은 아예 안 가지고 오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가지고 온다면 쓸모가 있을 것들을 정말로 몇 개만 적어본다. 내심은 혹시나 우리가 또 올 경우를 대비해서.


여기 적는 모든 항목은 우리처럼 가난하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는 ‘저예산 여행자(Budget traveler)’에게 해당되는 물품들이다. 공립 알베르게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서 사립 알베르게 개인실을 주로 이용하고, 세탁기/드라이기를 매일 사용해서 빨래하고, 메뉴 델 디아를 양이 많다면서 음식을 남기면서 대부분의 식사를 외식으로 해결하는 여행자의 경우는 가볍게 무시해도 될 품목들이라고 생각한다.


1. 줄 또는 운동화 신발끈

침대의 한쪽 가로+한쪽 세로 길이 정도의 끈.


알베르게에서는 나이가 좀 있는 사람에게는 이층침대의 아래쪽 자리를 준다. 아래쪽 자리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잠시 앉기에도 편리하고 한밤중에 화장실 가기에도 편하고 배낭에서 짐을 넣었다 빼기도 용이하다. 하지만 옆으로 돌아눕다가 바로 옆 침대의 언니와 눈이 마주치면 그냥 뻘줌~~~~할 때가 있다. ‘찌리릿’ 하면서 스파크가 튀면 좋겠지만. 그래서 줄을 'ㄴ'자로 침대 기둥에 묶어 두면 그 줄에 빨래나 수건을 널어 말릴 수도 있고, 바람막이 재킷을 걸어 두면 엄청 퍼퍼퍼블릭한 도미토리에서 나름 프프프라이빗한 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방 안에서 이불로 텐트 치는 기억을 불러내는 순간이다. 또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조심하지만 가끔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새벽형 순례자들의 헤드랜턴 광선검으로부터 눈을 보호할 수도 있다.


2. 칼, 특히 스위스아미나이프

매번 점심을 사 먹는 것이 지겹기도 하고 비용면에서도 고려하면 종종 바게트와 햄, 치즈 등으로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렇게 햄치즈 샌드위치 만들어 먹을 때, 알베르게에서 요리를 하는데 주방 칼이 시원치 않거나 한 개 밖에 없어서 혼자 독차지하면서 요리하기 눈치 보일 때, 간식으로 치즈나 초리조 잘라먹을 때, 걸으면서 주운 밤이나 사과 깎아 먹을 때, 와인 오프너가 없을 때 등등 매우 유용하다. 정작 와인을 사 왔지만 알베르게에 와인오프너가 없어서 당황해하는 순례자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선심 쓰면서 접근하기에 좋다. ㅎㅎ 하지만 코르크 오픈 연습을 좀 해야 한다. 자신 있게 열어준다고 말해 놓고 힘이 없어서 땀 흘리는 모습을 보이거나 코르크 마개가 실수로 부러져 버리는 경우에는 ??팔린다. 아무튼 이래저래 유용한 물건임은 분명하다.


3. 전자레인지용 용기 및 컵 또는 Collapsible Silicone용기

까미노길 마지막 100km 지점인 사리아를 넘어가면 알베르게의 주방엔 전자레인지 또는 핫플레이트만 있는 경우가 있고 냄비, 프라이팬, 수저, 포크, 컵, 접시 등등은 하나도 없을 때가 많다. 전자레인지에 물이나 우유를 데우려 해도 컵이 없으면 No답이다. ‘인천 앞바다가 모두 소주라고 해도 소주컵 없이는 못 마신다’라는 옛 분들의 지혜로운 말씀처럼 아무리 우유가 있어도 데울 용기가 없으면 따뜻한 우유는 그림의 떡이다. 출발 전 새벽, 실리콘 용기에 우유를 붓고 전자레인지에서 1-2분 돌리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출발할 수 있다. 아니면 캠핑용 티타늄 컵을 바로 하이라이트나 인덕션 위에 바로 올리면 주전자 대신 사용할 수도 있다. 아무튼 가벼운 티타늄 컵이나 실리콘 용기! 주변 순례자의 부러운 눈길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


4. 수저 겸 포크, 특히 접는 수저 겸 포크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무리 인천 앞바다가 까르보나라 파스타라고 해도 포크 없이는 못 먹는다. 내 경우는 피클 또는 적어도 김치도 있어야 한다. 아무튼 여기는 인도가 아니라 스페인이다. 알베르게에서 뿐만 아니라 걷는 중간중간에 도시락을 먹을 경우에도 매우 유용하다. 일회용은 웬만하면 쓰지 말자. 까미노길도 친환경 트렌드이다. 서양에서 플라스틱 봉지라고 부르는 비닐봉지나 일회용 용기 또는 수저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순례자들도 많이 보인다. 마트에서 비닐봉지를 주려고 하면 “No plastic!”을 외치고 나만의 ‘마포구청장배 볼링 대회’라고 적힌 시장바구니를 쿨하게 꺼내거나, 1회용이 아닌 개인용 수저/그릇을 가지고 다녀보자. 그런 순례자들을 보면 꽤 멋있어 보인다. 조금 불편해도 멋지게 살자!


5. 제일 중요하지만 제일 준비하지 않는 품목이 하나 있다.

‘이제 시작해서 언제 준비하겠어?’라고 하면서 본인이 준비하지 않는 사실을 슬그머니 합리화해 버리는 품목. 바로 ‘스페인어’다. 내일 떠난다면 오늘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몇 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위의 품목들 모두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즐겁고 풍요로운 까미노길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고, 이 나이에 내가 뭐, 언어가 며칠 한다고 뭐 되나? 난 머리가 나빠서’ 핑계 대지 말고 제발 좀 하세요. 좋습니다.


요즘은 듀오??라는 외국어 배우는 스마트폰 앱도 있다. A와 나도 2년 전부터 이 듀오??로 매일 한마디라도 배워보려고 했다. 초보 단계를 벗어날 일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번 까미노길에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바에서 주인장과 쓰잘데기 없는 수다를 떠는 우리 모습을 희망해 본다. 그러니 까미노길을 계획하고 있다면 날마다 스마트폰으로 고스톱 치기 전에, 루미큐브 게임하기 전에 5분이라도 하세요. 이 앱은 매일 공부하지 않으면 메시지로, 이메일로, 위젯으로 아~~~주 귀찮게 한다. 하지만 짜증이 나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나중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보람이 되고 재미가 된다.


덧붙여 언어를 배우면서 스페인 문화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나 관심도 있으면 좋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성당이나 교회 또는 역사적인 장소나 건물을 다닐 때 누군가가 설명을 해주면 100% 이해는 안 되더라도 이해하는 척은 할 수 있다. 물론 선행학습이 아니라 예습 정도만….


6. THE MOST important things in life aren't things.

마지막으로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까미노길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것’이 아니다. 옆에 걷는 순례자에게 ‘부엔 까미노’를 외쳐줄 마음, 나처럼 소심한 사람에게는 사실 ‘용기’가 더 필요하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는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말도 잘 걸고 쉽게 친해진다고 하지만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나는 마음속으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하고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말을 건다. 나란 인간은 참 내숭적인 인간이다.


알베르게 체크인한 후 내 자리의 침대로 가면서 먼저 옆 침대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대담함, 누군가 주방을 지저분하게 사용했으면 대신 정리해 주는 아줌마의 스킬, 이리저리 끙! 낑!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한번 토닥거려 주고 쓰다듬어주는 염려해 주는 엄마의 마음 같은 관심이 까미노길에서는 제일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