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2, 나는 선택받았다 2

Palas de Rei에서 Ribadiso까지

by Sal

오늘도 아침 일찍 출발해서 아직은 싱싱한 상태로 걸어가는 데, 저 멀리 앞쪽에 방송차량으로 추정되는 미니밴이 한 대가 정차 중이고 그 옆에는 앵커와 카메라맨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서 있다. 뭐지?



그다지 넓지 않은 길에 아침 일찍이라서 아직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니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칠 방법이 없다. 용기를 끌어 모아서 슬쩍 눈길을 한 번 주고 예의상 섹시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줬더니 우리에게 손인사로 답변을 한다……ㅎ는 것 같더니 대뜸 우리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갑자기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헐… 갈리시아 지방 방송국인데 까미노길의 노란색 화살표에 대한 순례자들의 의견을 묻는 중이라고 하면서 마이크를 들이댄다. 그래서 답변을 했다.


먼저 노란색이라서 눈에 잘 띄어서 좋고

두 번째로 색깔이 따뜻한 느낌을 주어서 좋고

마지막으로 좀 생각하는 척하면서 뜸을 들이다가 시크하게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노란색이라고 했다.

앵커가 나의 ‘아재’ 개그를 이해하는 듯 웃으면서 자기도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한다. 자식!


아직 아침이라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싱싱해서인지 유~~창한 영어와 (사실 일부러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면서 머릿속으로 열심히 영작을 했다. 좀 그럴듯해 보이도록 수여동사 들어가는 4 형식 문장으로, 3인칭 단수 주어 뒤에 동사는 s는 붙였는지 등등 문법 체크까지 하면서 ㅋ) 그다지 머뭇거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말투로 천천히 답을 했다. 짝짝짝!!!


10년 전 세계일주 때 스페인 세비야의 봄축제에서도 축제구경을 하면서 걷다가 우연히 지역 방송사와의 인터뷰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10년 만에 또 당한 셈이다. 우연의 뜻을 찾아보니 ‘아무 인과관계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데, 정말 인과 관계가 없는 것일까? 내 삶과 스페인, 아니면 나와 방송이라는 업종 간에 무슨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은 아닐까? 늦게라도 연예계에 데뷔를 해야 하는 무슨 암시 같은 것이 아닐까?




점심은 문어요리로 유명한 멜리데에서 드디어 문어를 먹었다. 피레네산맥을 같이 넘을 때부터 줄곧 길에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던 모녀 순례자와 만나서 같이 먹었다. 이제 순례길의 막바지에 이르니 그동안 인사는 많이 했지만 한 번도 같이 앉아서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여기를 떠나면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니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했던 것 같다.


초고속 걸음의 모녀를 먼저 보내고 오늘의 목적지인 리바디소(Ribadiso)에 도착하니 마을 초입에 개울이 하나 있고 바로 그 옆에 작은 알베르게가 있다. 여름이었다면 개울가가 순례자들의 물놀이터가 됨직한 한적한 곳의 아담한 알베르게이다. 이 마을도 슈퍼도 주방도 없는 곳이라서 알베르게에서 제일 가까운 식당에 갔더니 근처의 모든 순례자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이미 앞서 간 줄 알았던 초고속 걸음의 모녀도 한쪽 테이블에서 다른 순례자와 수다를 떨고 있다. 우리와 같은 알베르게에 조금 늦게 체크인한 우고도 최근 자주 같이 다니는 언니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우리도 A가 선정한 까미노길 프렌치루트 최악의 알베르게인 산 마르틴 델 까미노에서 만났던 갓 군대를 제대한 젊은 친구와 같이 앉았다. 그리고 까미노길에서 제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꼰대 얘기를 그만 그날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안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이 꼰대 근성은 정말 쉽게 사라지지 않나 보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적어도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고 그 솜털 송송한 친구가 물어보니까 그냥 인생 선배로서 답을 조금 길~~게 한 것뿐이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인데 그건 다 내 혼자 생각이고 그 친구가 듣기에는 다 피가 흐르도록 귀 아프고 영양가 없이 살만 찌는 저녁시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내 이런 꼰대 성향과 오전의 방송인터뷰와 무슨 인과관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