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badiso에서 O Pedrouzo까지
초고속 스피드의 모녀 순례자를 또 만났다. 이분들은 정말 백만 스물다섯 번, 백만 스물여섯 번의 에너자이저들이다. 동일한 에너자이저 겸 스파이인 A는 나와 같이 걸을 때는 느려서 답답했는지 오랜만에 유사한 속도와 유사한 수다능력을 가지신 분을 만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목적지를 향해서 진격해가고 있다. 나는 한참 뒤에서 그저 쫓아가느라 바쁘다.
모처럼 근처에 슈퍼마켓 디아도 있고, 알베르게에는 쾌적한 주방도 있어서 점심은 삼겹살에 신라면으로, 저녁은 유사 해산물 리조또로 정했다. 물론 비어와 와인도 같이.
이제 하루만 더 걸으면, 내일이면 모든 까미노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다. 우린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대서양 바닷가 마을인 피스테라(Fisterra)까지 갈 계획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 여정이 마무리가 되니, 슬슬 마무리 준비를 해볼까 한다. 그래서 산티아고 까미노길에 다녀온 소감을 자문자답을 해볼까 한다.
제일 힘들었던 점은?
아픈 거지 뭐!
생장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피레네 산맥을 얼떨결에 넘느라 힘들었고 바로 다음 마을인 수비리에서는 발바닥은 물론 온몸이 나를 향해 “너 제정신이야? 너 미쳤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니?”라고 발악을 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남들은 며칠 지나면 적응이 된다고 하던데, 내 경우에는 중간에 며칠 적응을 하는 듯했으나, 결국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전혀 적응을 하지 못했다. 새끼발가락 발톱이 아프더니, 동시에 오른쪽 종아리 뒤편이 붓고 아프고, 종아리와 발이 좀 나아지더니 발목이 좀 아프고, 산티아고 도착 일주일 전부터는 계속 종아리 앞쪽 근육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아프다. 다만 머리는 하나도 전혀 아프지 않다. 사실 눈과 입이 머리에 달려있지 않았으면 내 머리가 아직 달려 있는지 잊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래도 머리가 몸을 지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또다시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몸이 아프고 머리는 전혀 아프지 않으니 다시 까미노길에 갈 마음이 생긴다. 아니면 머리가 미련해서 몸이 아팠던 것을 벌써 다 잊어버려서일지도 모르겠다.
제일 좋았던 점은?
우문 같지만 그래도 대부분 툭 던지는 질문일 테니까 일단 답해본다. 아마도 "달라서 좋았고 같아서 좋았다"인 것 같다. 여러 나라에서 온 남녀노소 내외국인 친구들과 새로운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좋았고, 이야기하다 보면 모두 다른 곳에서 왔지만 결국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점을 깨닫고 나서 또 좋았다. 새로웠다. 특히 까미노길에서는 모두가 한 곳을 향해서 걷는다는 점이 비록 혼자 걷고 있지만 모두 같이 걷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왜 나는 달라서 좋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살았던 시간대, 묶여 있었던 공간 그리고 어울렸던 집단에서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새롭게 알게 되어서 좋았던 것 같다. 새롭게 알게 된다는 느낌은 단순히 ‘정보 또는 지식이 +1’ 추가되었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거나 ‘유레카’를 외치거나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방의 문을 활짝 여는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깝다. 그동안 내내 코끼리 엉덩이만 보면서 살았는데, 누가 돌아가서 보라고 해서 돌아가보고 '커다란 코'를 발견한 기분이다. 아마도 내가 살던 동네와는 전혀 다른 동네에서 다른 생활방식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처럼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고 머릿속의 전구가 반짝 켜지는 경우가 생기는 확률이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친구들은 나와 같이 있다 보면 내 머릿속의 전구보다 더 많은 전구가 반짝 반짝 켜졌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ㅎ
그러면 왜 같아서 좋았을까?
아주 오래오래전부터 다른 동물에 비해서 빠르지도 못하고 튼튼한 송곳니나 팔다리도 없었던 호모 사피엔스는 같이 있어야 생존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은 본능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나 SNS를 한다고,...
보기에는 말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생각도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은 이런 오만가지 다름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발견하면, 마치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우연히 식당에서 밥먹다가 레지스탕스를 만나는 안도감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까미노길에서는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동일함이 있다. 그리고 그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두 발바닥이나 무릎이 아프고, 매우 피곤하고, 매우 일찍 자고, 매우 코를 심하게 고는 등등 일관성이 있고 덕분에 이곳에서 우리는 매우 끈적끈적한 동질감, 소속감, 연대감을 느낀다.
보통 우리가 떠나는 여행은 여기에서 무슨 테마파크, 저기에서 무슨 미술관, 또 다른 곳에서 국립공원을 가야 하는 등 여러 개의 작은 기착점으로 구성된 다양한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까미노길은 모든 여행자가 동일한 목적지와 그곳을 향해 가는 소소한 여정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오롯이 그 목적과 여정에 집중할 수 있는 여행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순례자들과 순간접착제처럼 보자마자 끈끈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행이다. 이 반짝 전구와 끈끈함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저 와인과 올리브가 좋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뭐 느낀 점은? 기억에 남는 점은?
이거 또한 우문이지만 한마디로 현답을 해보자면 딱히…없지만
“산티아고 길은 힘들다.”
“그래도 재미있다.”
피레네의 일출, 메세타의 메마른 경치, 중세풍의 골목길 등 경치도 기억에 남고 산티아고 대성당을 비롯해서 수많은 오래되신 성당과 교회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어느 바에서 커피 마시면서 나눈 대화, 알베르게 주방에서 같이 와인 마시면서 즐거웠던 순간, 그러니까 나는 사물보다는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 경우에 메모리 용량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ㅎ 그렇다고 자연이 아름답지 않았다거나 감동이 없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시 가고 싶은지?
글쎄….
코를 많이 골던 나이가 좀 드신 호주 커플의 말을 빌리자면 본인들의 경험으로는 힘든 기억이 4년 정도가 지나면 잊혀지고, 그 후에야 다시 한번 갈까 하고 서로 눈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두 번째 까미노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1년이 지났다. 이 말이 정말 맞는다면 내 경우에는 내가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해서 빨리 잊어버릴 확률이 높으니까 한 2년 정도만 지나도 다시 간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간다면 어떤 점을 개선?
그다지….
개선할 점은 별로 없다. 다만 짐은 좀 더 줄여갈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나 해서 챙겨 간 면티 한 장 더, 양말 하나 더, 속옷 하나 더 등등 ‘혹시나’ 해서 넣은 모든 짐들은 ‘역시나’ 짐만 된다. 스페인도 사람 사는 곳이고 까미노길이 북극이나 남극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존 정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꼭 있지 않으면 안 될 ‘must-have’ 품목만 챙기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이 생각되는 ‘nice-to-have'품목은 살포시 내려놔야 할 텐데…. 막상 또 짐을 쌀 때에는 그때 가서 내가 무슨 심통을 부리고 또 가져갈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차피 다시 간다고 해도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달라진 숙소'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면서 '달라진 풍경'을 보면서 걸을테니까 같은 까미노길을 걷고는 있겠지만 그길은 같은 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는 '한층 더 슈퍼 업그레이드된 에이젼트 A'와 까미노길을 걸을 테니, 비록 다시 걷는 길이겠지만 그 길이 그 길이 아닐 것 같다.
가장 맘에 들었던 순간이나 마을은?
Najera 알베르게 앞 벤치에서 며칠 만에 보았던 햇살과 그 아래에서 와인과 파스타
San Domingo de Calzada 알베르게 바로 앞 햇살 좋은 카페의 파라솔 아래에서 맥주와 칼라마리 튀김
Belorado 저녁식사 후에 움베르토와 엘레나의 보사노바 라이브 콘서트 감상
San Juan de Ortega 광장바닥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같이 하는 스트레칭
Fromista 알베르게에서 와인 & 살사 댄스파티
Leon 대성당 앞의 바에서 Pierre 등 동료 순례자들과 오랜만에 조우
안토니오 아저씨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에게 나눠주었던 요리들: 파스타, 리조또, 샐러드
안 좋은 기억?
딱히 없다. 아니면 내가 기억력이 없어서, 특히나 이런 좋지 못한 기억들은 빛의 속도로 더 빨리 사라져 버린다.
마지막으로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까미노길을 걸으면서 과연 얻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물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나, 우리가 중심이고 그 주변으로부터 우리는 뭘 얻어갈 것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까미노길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까미노길에 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고로 ‘Give and Take’를 해야 하는데,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까미노길에서 즐거운 기억을 만들었으면 나도 까미노길에게 무언가 주고 갈 생각을 해야 되는데. 질문을 바꿔야겠다. “너는 까미노길에게 해준 게 뭐니?”
가끔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명문대에 들어가서 명문 타이틀 후광의 효과를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니네가 그 명문학교에 들어가서 그 학교를 더 명문학교로 만들어 줄 생각을 하라고 말했는데….
내가 까미노길을 걸어서 까미노길은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내 덕분에 까미노길을 걸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더 즐겁고 보람된 까미노길이 되었을까? 그래서 결국 까미노길이 더 즐겁고 더 멋있고 가치 있는 길이 되었을까? 내가 이곳에 다녀온 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