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Pedrouzo에서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역시나 내 저질 체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목적지, 그러니까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기 전 대충 700m 지점부터 갑자기 또 오른쪽 종아리의 앞부분이 말썽을 부린다. 별로 있지도 않은 근육에 통증이 있더니 마지막 길은 800km가 아니라 8,000km 정도는 걸은듯한 순례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오늘의 일기예보는 비가 100% 온다고 했지만 다행스럽게 목적지 도착 바로 전까지 뽀송한 상태를 유지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해서야 조금씩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내렸다 멈췄다를 계속 반복한다. 광장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어디선가 백파이프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은 설레임이 서서히 올라온다.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면서 광장으로 통하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서 밝은 세상으로 나오니 ‘울랄라!’ 하고 넓~은 광장이 ‘짜잔’하고 펼쳐진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형태로 이 '최종 목표달성'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우리는 광장 한쪽 코너에 서서 아직 이런 축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도 저렇게 즐거워해야 하는데...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상 몸은 멀뚱멀뚱 서있는데 저쪽에서 반가운 얼굴인 안드레가 활짝 웃으면서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든다. 세상에… 그리고 그 옆에 피에르가 보이고 우리 뒤로는 마이크가 막 도착한다. 껴안고 서로서로 축하하고 같이 사진 찍고 웃고, 또 누가 도착하면 또 껴안고 또 축하하고 또 사진 찍고 또 웃고 계속해서 '도돌이'다. 아는 얼굴 하나도 없었으면 그 큰 광장에서 멀뚱멀뚱 둘이 어쨌나 모르겠다.ㅋ
이제부터는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좀 지루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이 굳이 분류를 해보자면 그래도 여행기인 만큼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우리가 1박 2일에 걸쳐서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아래에 적어 볼 예정이니 성질 급한 사람은 동키 보내시고 이 구간은 건너뛰어도 됩니다.
광장 바로 옆의 알베르게에 마지막 남은 두 자리를 운 좋게 그곳에 먼저 묵고 있는 피에르 덕분에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체크인을 했다. 체크인 후 알베르게 문을 나서자마자 우고와 안드레가 알베르게 바로 앞의 바 파라솔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적어도 여기에 있는 동안만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거의 100%의 확률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제일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중요한 ‘증’을 받으러 순례증명서 사무실을 찾아간다. 그곳에서도 역시 '증'을 받으러 온 캐나다의 미셸과 클라라를 만나서 서로 축하축하를 하고, 사무실을 나오는 길에는 또 캐시를 만난다. 프로미스타의 밤이 본인에게는 카미노길 최고의 밤이었다고 하면서 다시 한번 그때의 즐거움을 복기시켜 준다.
저녁에는 피에르와 우고에게 한국 아줌마의 음식 솜씨를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알베르게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그래서 까미노길 마지막 장을 보러 마트로 걸음을 옮기는 데, 그 길에서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한국 언니들과 올블랙 패션의 멋쟁이 한국 총각도 만나고 새 신발로 갈아 신은 라우라와 프랑스 언니를 만나서 또 긴 인사를 나눈다.
마트에서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직 숙소를 찾아 헤매는 머리에 늘 꽃을 꽂고 다니던 세실 언니를 만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바로 전 마을인 오페드로소(O Pedrouzo)의 알베르게 이층 침대 위에서 책을 읽던 독일 커플인 유르겐과 율리아도 만난다.
모 PD덕분에 한국사람들에게 유명하겠지만 우리는 비추!인 비아프랑카의 알베르게에서 바로 앞 침대에서 잔 미국인 스티브와도 지나가면서 축하인사를 교환한다. 숙소로 돌아오니 프로미스타의 4인실 같은 방에 있었던 마리 언니가 어제 우리 알베르게에서 묵었는지 자기 짐을 찾으러 오는 바람에 또 마지막 인사를 한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부터 종종 만났던 프랑스 노부부는 알고 보니 오늘 밤 바로 옆 침대에서 주무신다. 마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 큰 도시가 마치 내 구역이(조폭 전문 용어 "나???"를 사용하면 더 정확한 느낌 전달이 되겠지만 자제한다.ㅎ) 된 것 같다.
드디어 피에르와 우고를 불러 돼지고기 찌개를 해 먹였다. 먹을 때만 되면 어떻게 알고 나타나는지 대만의 마이크도 역시 나타났다. 미치루와 동생인 겡끼를 못 먹여서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친구들이라도 밥을 한 끼 같이 먹이니 마치 한 학기 수업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 리포트까지 제출 완료한 느낌이다.
우리보다 한참을 앞질러간 코냑 출신의 조단은 아마도 이미 피스테라까지 갔을 것 같다. 내일은 연락이나 한번 해봐야겠다. 사리아 가는 길에서 비를 쫄딱 맞으며 만난 귀여운 모에까도, 난 패딩조끼까지 입고 다니는데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는 폴란드 커플 야렉과 빅토리아도 아직 못 만났는데….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내 발목 통증 때문에 어제저녁까지도 다른 여정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결국 오늘 아침에서야 피스테라(Fisterra[1])는 가지 않고 여기에서 우리의 까미노길 여정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땅땅땅! 피에르는 오늘 피스테라로 출발하기로 했는데, 전날 새벽까지 뭘 했는지 도미토리에 올라가서 한번 깨웠는데도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피에로를 기다리면서 역시 피스테라로 오늘 떠나는 우고와 로비의 소파에 로마인 귀족 포즈로 비스듬히 누워서 까미노길에서 느낀 소회를 잠시 정리했다. 역시나 뭔가 정리해 보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고 뭐 하나라도 얻어가려고 하는 이 본성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참 무언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듣고 느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끄집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우고와의 대화를 인용하면서 아래의 다섯 가지로 까미노길에서 느낀 점을 최종 정리해 본다.
Every step matters. (한발 한 발이 모두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
노란 화살표
배려
Every moment matters. (까미노 길 위에서 모든 순간이 중요하다.)
La vida es dura. (인생은 힘들다.)
우고에게 넌 까미노길을 걷고 느낀 점이 뭐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을 한다
“날마다 한걸음 한걸음이 중요하다. 매일 걷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댓구한다.
“그런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목표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항상 있었기에 날마다 한 발 한 발 걷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장기 목표 또는 방향성이 중요하다. 정해진 방향으로 현재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
내 경우에는 까미노길은 몸을 최대한 사용함으로써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머리는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길이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노란 화살표였다. 그동안 내가 많이 해왔던 수많은 중장기 계획 수립, 개선 방안, 대비책, 권모술수, 잔머리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잊고 그저 노란색 화살표만 찾아다니면 된다. 목표를 정하면 묵묵히 꾸준히 담담히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데, 이것 까미노길에서는 마침내 그것을 해낸 기분이다.
우고가 또 말한다.
“여기서는 모두가 만나기만 하면 부엔 까미노 하면서 인사하고 서로의 몸 상태, 발 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같이 즐거워한다. 대도시에서는 아무도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기에 내가 또 보탠다.
“방향성도 중요하고 완주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은 까미노길을 걸었던 과정인 것 같다. 매일 걷기를 마치고 알베르게에서 같이 어울려 떤 즐거운 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목표와 화살표도 중요하지만 걷는 동안의 순간들이 제일 중요한 알맹이인 것 같다.”
까미노길은 '혼자 걷는 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여행과 관련되어 ‘혼자’라는 단어에서 유추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일단 익숙하지 않은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섭고 외롭고, 늘 주변을 경계해야 되고, 화장실에 갈 때 짐까지 챙겨야 하니 귀찮고, 혹시나 아프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약도 잘 챙겨야 하고, 혼자 밥 먹고, 같이 수다를 떨 사람도 없다. 만약 이런 내용들이 ‘혼자’라는 말의 정의라면, 까미노길은 절대로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아니 혼자 다니는 것이 불가능한 길이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까미노길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곳이다. 이 길은 '배려'가 차고 넘쳐나는 곳이다. ㅎ
그리고 같이 다니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인사하고 걱정하고 도와주고 도움을 받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하는 매 순간들이 까미노길의 알맹이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사람이 주인공이고 사람 간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메인 스토리이지 엄청난 규모의 건물, 수천 년 된 도시, 호화롭게 잘 꾸며진 까페는 모두 주인공을 도와주는 배경이고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까미노길에서도 아무리 풍경이 멋있고 성당이 웅장해도 역시 내 까미노길 영화의 주인공도 '사람'이고 바로 '나'다.
마지막으로 우고가 얘기한다.
“사람마다 몸 상태도 다르고 걷는 속도도 다른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결국 목적지에서 모두 다시 만난다는 것이 신기하고 즐겁다.”
나는 이렇게 댓구한다.
“맞다. 그런데 산티아고 길을 걸은 후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있겠지만, 누가 나에게 그중에서 딱 하나만을 고르라는 아주 비합리적인 우문을 한다면 내 경우 답은 이렇다.
그래도 까미노길은 힘들다.”
마지막 내 느낌 “까미노길은 힘들다.”는 약간 부연 넋두리가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까미노길 프렌치루트 800km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북쪽 까미노길(Camino del Norte)에 있는 몇몇 도시들을 여행하기로 했다.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당연하지 않고 매우 어색하게 느껴지는 내가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이동이 되는 신기한 버스를 타고 두 번째 도시 오비에도에서 빌바오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버스 시간이 마땅하지 않았다. 무작정 버스터미널로 가서 창구에서 버스시간을 물어보니 안타깝게도 바로 몇 분 전에 버스가 떠나 버렸다. 다음 버스를 물어보니 무려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단다. 기다리는 것은 둘째고 그러면 한 밤중에 빌바오에 도착해서 참 난처하게 되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티켓창구에는 얼핏 보기에도 우리 보다 한참 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이 앉아있다. 우리가 창구 앞에 서서 이리 고민하고 저리 고민하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La Vida es Dura! (Life is hard!)
갑자기 머릿속의 전구가 깜박거리면서 불이 들어온다. 그렇군…. 원래 그런 놈이었지, 인생이라는 놈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천천히 터미널 의자 쪽으로 걸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세 시간쯤이야….
끝.
[1] 엄밀히 말하면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지만 유럽기준에서 가장 서쪽으로 나온 땅인 세상의 끝은 포르투갈의 Cabo da Roca이다. 구글지도로 눈으로만 봐도 그냥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