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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ya Dec 03. 2021

오늘의 장르

드라마

나는 오늘 선화를 만나기 위해 친근하지 않은 강변역으로 갔다. 다음 행선지인 압구정역을 가기엔 시간도 넉넉하고 날씨도 화창하고 해서 따릉이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워낙 길치이기에 네이버 지도를 몇 번씩이나 봤지만 왠지 걱정되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따릉이를 대여하는데 옆에서 21~23세 정도 되는 여학생도 큐알코드를 찍고 있었다.

단발머리 얄상한 얼굴 맑은 눈동자, 베이지 뽀글이 조끼에 맨투맨을 입은 저 친구도 잠실철교를 넘어 한강변을 달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번 저 학생을 쫓아 가봐야겠다 싶어, 평소와 다르게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 학생의 뒤를 쫓아서 슬금슬금 가는데 역시나 잠실철교 쪽으로 진입했다. 낯선 한강뷰도 좋고 날씨도 그럭저럭(공기 미세먼지는 었지만) 좋았지만 무엇보다 길안내를 해주는 앞의 학생의 흥이난 뒷모습을 보니 내 기분도 업 되고 있었다. 그 애는 신나는 음악을 크게 듣고 있는지 큰 목소리를 뿜뿜 자랑하고 있었다.

한강 바람을 맞으며 그 애와 앞뒤로 달리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하이틴 드라마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앞에 단발머리 주인공의 친구 정도의 위치로 한강공원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느낌으로, 상큼 발랄해지는 기분으로 다리를 중간쯤 가는데 3명 정도의 사람이 다리 난간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다리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호기심에 궁금해졌으나 길 안내자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애도 음악소리를 뚫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자전거를 멈추기에 나도 바로 옆에 자전거를 나란히 세우고 소리 나는 쪽인 한강 아래를 내려다봤다.

‘설마 저 아래 뭐가 있겠어?’ 어떤 남자가 얼굴만 동동 떠서 위를 올려다보면서 "살려주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수영을 좀 하는지 어쩐지 알 수 없었지만 움직여서 다리 기둥으로 가지는 못했다. 간신히 얼굴만 물 밖으로 간신히 떠 있는 것 같은데 "살려주세요"를 어찌나 크게 외쳐대던지, 다리 위의 사람들에게 들렸고, 이미 2~3명의 사람들이 119에 신고를 완료하고 위치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꼈다.

안타깝고 다급한 마음으로 그저 그 사람이 제발 구조되길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그 여학생이 “아!! 어떡해 어떡해" 이러더니, 큰 목소리로 " 조금만 기다리세요!!" "신고했어요" "구하러 올 거예요" 물속의 남자를 향해 최선을 다해 소리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 남자는 희망의 대답을 들었는지 위를 쳐다봤고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의 입에선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난 그 어떤 리액션도 나오지 않고 얼어붙은 듯이 그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난 처음 보는 간절한 그 눈빛과 표정에 압도된 듯했다.

내 옆쪽에는 그 사람이 벗어놓고 간 검은색 운동화와 검은색 점퍼가 놓여 있었다. 계속되는 그 사람의 외침을 들으며 다리 위에 남겨진 옷가지들을 보고 멍하니 있자니, 내가 아무 도움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사람에게 격려의 말을 소리치며 두 손 모아 구조를 기다리기다 마지막엔 박수와 환호를 구조원들에게 보내는 그런 장면을 연출할 자신도 확신도 없었다.  '무쓸모인 나는 여길 벗어나자.'  자전거를 페달을 무겁게 밟으며 마음속으로 그 사람이 구조되길 그리고 될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며 다리 끝부분까지 갔다.

하이틴 드라마라고 느끼며 시작했던 다리의 시작점을 지나 갑자기 중간지점에서 암울한 비극 드라마로 엔딩을 맞고 싶지 않은 내 마음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다리 끝에서 심난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고르고 있을 때 반갑지 않은 전화가 왔지만 나답지 않게 성실하게 한참을 통화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때 길잡이였던 여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지나 내가 가려던 한강변 자전거도로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다시 하이틴 드라마 여주인공의 가볍고 상쾌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구조대 3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남자가 남겨뒀던  옷의 방향을 가리키는 걸 보니, 챙기러 오는가 보다. 난 그들의 표정을 아주 꼼꼼히 살펴봤다. 그들의 장르는 지금 무엇인가?! 다행히 그들의 발걸음도 표정도 가벼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계속 그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각났다. 수십 번은 외쳤을 텐데 목소리가 쉬지도 않고 또랑또랑 정말 크고 정확하게 들렸다. 눈빛도 너무나 간절했고 지치거나 포기할 얼굴은 아니었다. 강렬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뚜렷한 얼굴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간절하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동안 내가 들었던 그리고 내가 고통 속에서 했던 살려달라 도와달라는 외침은 적당한 간절함이 버무려진 소리였구나.

살고 싶어 발버둥 치던 간절한 그 목소리와 눈빛을 보니, 아 저 사람은 이제 오늘도 살고, 앞으로도 살겠구나 싶었다.

그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암울한 에피소드나 어두운 장르의 새드엔딩으로 만드는 게 아닌 해피엔딩으로 가는 이야기 속에 하나의 추억으로 기록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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