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어렵지 않으나, 내 글을 읽어줄 이를 찾는 것은 어렵다. 누군가를 향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이 순간조차도, 글이 세상 밖으로 놓아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쓰는 순간에는 글쓰기를 지극히 나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면서, 쓰고 나면 남이 읽어주길 바란다.
내가 쓴 글인데, 글을 읽는 일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써내려 감으로써 후련하고, 쓰고 나서의 쾌감만으로도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인지. 세상 간사한 악당, 조커가 내 속에 살고 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필사하다, 반가운 문구가 나온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눈과 귀에 꽂힌다. 책을 쓸 때마다 실패한다고 하신다. 글을 쓸 때마다 실패하기에 쓰고 또 쓴다 하신다. 내 마음과 같아, 세상에 없는 이의 글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스스로 실패했다고 일컫는 이어령 선생님의 글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찰나의 위로 뒤엔 현타가 온다. 레벨이 다르잖아, 수준이 다르잖아 싶다. GDP에 그 가치가 환산되지 않는 전업 주부, 미국의 아미시 Amish처럼 산 지가 14년이다. 전업 주부의 실패와 문체부 장관이 맛 본 글쓰기의 실패는 차원이 다른 거야라고 말하고 나면, 성냥에 잠시 붙었던 불씨처럼 희망이 화사삭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지면 절망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평온함이 온다.
브런치이든, 서점이든 전업주부의 글만 찾아본 적도 있었다. 거장들은 하나 같이 국문과를 나오셨다. 박완서 선생님의 전업주부에서 등단작가로 변신하셨으니 좋아라 하고 약력을 읽어본다. 서울대인데 심지어 국문과이시다. 전쟁으로 인한 중퇴이셨으니 중퇴란 단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아버지도 서울대, 작은 아버지도 서울대, 집안에 서울대가 많아 한국 사람치고는 서울대에 주눅 들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마흔이 넘은 삶 중에 학벌에 가장 움츠러드는 때다. 서울대 국문과 중퇴쯤은 돼야 읽히는 글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전업주부 일상이 주 종목이 없이 이것저것 돌봐야 하는 멀티 플레이어의 끝판왕이다. 한 가지 특히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을 연이어 내기 쉽지 않다. 오늘처럼 남편은 일터, 아이들은 학교로 사라져 집안에 정적이 흐르면 기쁨과 허무함이 동시에 차오른다. 24시간 따라다니는 글감인 나를 글이라는 거울 앞에 둘 시간이 통으로 3시간이다.
문제는 아이들 올 시간을 마감시간 삼아, 나에 대해 3시간을 바쳐 써내고 나서 발생한다.
오늘따라 글쓰기에 신공이 들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춘다고 치자. 그런 날은 3시간이 아니라 30시간도 쓸 판이다. 가족들이 돌아오면 키보드를 닫아야 하는데, 글 저장 버튼을 누르고 본래의 주부로 돌아왔다가 그다음 날 저장 글로 돌아가면 신공이 사라지고 나서다. 글은 용머리를 한 지렁이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쓴 글은 보기가 안쓰러워 퇴고도 하기 싫다. '부부의 세계'급으로 시작한 글이 '사랑과 전쟁'급으로 끝난다고 해야 할까? (사랑과 전쟁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사랑과 전쟁은 즐겨 봤답니다.)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나만의 마감시간까지 집중하여 퇴고까지 해 올릴 수 있는 운수 좋은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좋아요, 또는 하트가 홈쇼핑 전화 매출 숫자 올라가듯 쭉쭉 상승했으면 하고 기대를 잔뜩 한다.
글을 올린 시간이 날 좋은 토요일 오전 11시다. 글을 읽을 이가 없다. 팬덤이 없는 무명작가의 글이야말로 외면받기 가장 쉬운 대상일 것 같다.
글 읽기를 좋아하는 뇌란 없다. 뇌는 보는 즉시 인지되는 그림을 선호하지 해석해야 하는 부호는 귀찮아한다. 이미지와 미디어에 둘러싸여 사는 현대인에게 글이란 생존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내팽개침 당하기가 일쑤다. 오늘은 내 마음속으로 겨울이 걸어 들어왔기에 신나게 시린 북풍의 광야를 그려냈는데, 100일 만에 쨍한 해가 나온 날씨다. 시의적절함이란 점수를 매긴다면 100점에 10점짜리다. 눈치코치가 무명작가의 글, 그 존재의 운명을 결정한다.
코로나로 식구들이 집에 바글바글 하던 시간들 속에서 안식을 준 글쓰기라 글쓰기 자체로 고마웠다. 즐거움에서 끝나면 되는데, 누가 좀 읽어주었으면, 들인 시간이 돈으로 교환가치를 갖음으로써 세상도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두서없이 쓴 장문을 블로그에 올리면 하트가 5개 미만이라, 열흘 정도를 마른 걸래 짜듯 뇌를 쥐어 비틀어 브런치 공모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작가라 불러주는 브런치 속에서는 적어도 나는 작가다. 작가라는 단어 앞에 ' 무명'을 또는 단어 뒤에 ' 지망생'이라 붙임으로써 검색량과 좋아요 버튼에도 난 의연해라며 툭툭 어깨를 보담아 본다.
그럼에도, 나에겐 내가 유명 작가고 최고의 아티스트이기에 오늘도 조회수와 하트를 보면 " 왜인데!"라고 방바닥을 뒹굴어 본다. 윗 집에서 " 아, 왜! 안 읽어주는 건데. 좋아요 왜 안 눌러주는 건데." 라며 징징거리며 바닥을 쿵쿵 밟아대는 주부의 울부짖음이 오후 1시 언저리에서 규칙적으로 들리신다면, 그것은 당신이 호박씨의 이웃이라는 뜻이다. 반갑습니다, 이웃님. 작가 호박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