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남편은 집에서 6개월 정도 푹 쉬고 싶었다고 했다. 남들보다 반학기 빨리 졸업했고, 한국의 공채 시즌이 지나가버린 1월에 그는 입국했었다. 여름 공채까지는 놀 수 있겠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 L 사의 공채 공고가 떴고, 덜컥 의도치 않게 붙어 버렸다. 그 L사 공채를 호박씨는 떨어졌더랬는데, 남편과의 인연은 그 지점부터 시작되었고, 이야기는 후에 하도록 하겠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나 입국한 남편은 해운대의 시댁에서 자고, 먹고, 운동하고, 또 잤다. 남편의 꽃 휴가는 대기업 합격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문제는 서울에서 지낼 남편의 거처였다. 편입 전 한국에서 다니던 D 대학 동창인 친구 K 가 해결안을 제시해주었다. K 아버지는 H은행 법인장으로 러시아에서 오랜 주재를 하였고, 주재 동안 모은 월급과 부동산을 보는 혜안으로 양재동에 아파트와 빌라를 몇 채 사두셨더랬다. 그중의 한 채 꼭대기에 살던 K는 침대 하나 더 들어올 공간이 되니, 남편에게 함께 지내기를 제안했었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K에게 내내 고마워했다. 시어머니는 서울을 어려워하신다. 부산에만 도착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셨다가도, 서울에 오시면 갑자기 노인이 되신다. K 부모님이 가진 재산이 강남에서도 저렴한 편인 양재동 위주이지만, 부산 사람에겐 양재동은 엄연히 강남권이니 남편과 어머니에겐, K는 강남 금수저 친구인 셈이다.
그간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남편만 K에게 의지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의 캐나다 유학 기간에 K를 비롯해서 친구 H까지 남편이 길을 열어둔 캐나다로 속속 어학연수를 왔더랬다. K와 H에게 조언도 해주고, 그 둘과 미국 서부 자동차 투어도 했다. 서부 횡단의 긴 드라이브로 운전 잘하는 남편의 몫이 대부분이였다 했다.
어떤 관계도 일방통행으로는 지속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남편과 어머니는 틈만 나면 서울서 회사를 잘 다닌 것은 K 덕이라고 했다. 남편이 함께 지낸 2년이란 기간 동안 적정 월세를 제공했고, 한 방에서 둘이 지내며 서로 맞춰 지내느라 마음고생도 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어머니는 K가 은인이라고 남편에게 거듭거듭 이야기하셨다.
"내 친구가 얘들 보려고 우리 집에 온 거 아니잖아."
그날은 컨테이너 도착한 다음 토요일이었고, 이틀 후면 나의 첫 독일어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독일어를 모르니 독일어는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 모르는 까막눈의 미로 속에 빠져있기가 한치도 싫었다. 얘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내 나라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독일어부터 배워야 한다 싶었다. 마음이 급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마침 한인 마트에 한국인 독일어 선생님의 공지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혼자 교실을 찾아가야 하는데, 까막눈에다 구글맵 보는 법도 낯설어서 남편이 한 번 같이 가줬으면 싶다. 차로든, 대중교통으로든 함께 가줬으면 좋겠다.
K는 우리보다 3개월여 먼저 와있었다. 와이프 S와 아이들은 K의 구매대행 사업이 자리를 잡고, 집도 구하고 나면 독일도 올 예정이었다. 혼자 독일에 3개월여 생활을 하고 있는 K를 이제 막 짐을 푼 우리 집에 초대한 남편. 사실 한시라도 빨리 초대하고 싶은 눈치였다. 집 초대를 하고 와이프가 집밥을 손님에게 대접해야 제대로 된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그의 옛스러운 관계 맺기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변변한 살림 없이 자리 잡아가고 있는 부엌에서, 까막눈으로 장 봐온 것들로 김밥을 만들었다. 김밥을 먹은 두 남자가 나란히 TV를 보며, 거실 의자에 앉아있길래 남편에게 수업 주소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어 교실을 찾아가면 정신없으니까 K에게 잠시만 부탁하고 나갔다 오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오버 오젤 다운타운 주변이라 남편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위치만 알고 나면, 수업 날은 U-Bahn을 타고 혼자 나서볼 요량이었다.
그렇다. 친구가 우리 얘들을 봐주러 방문한 것은 아니다. 그럼 친구 K를 부른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혼자 3개월을 독일 생활을 하며 고생하는 사업 초기의 친구에게 한국 밥 한 끼를 먹이려고 불렀을 것이다. 3개월 동안 변변히 챙겨 먹었을까 배려해주는 의미에서 와이프에게 집밥을 해달라고 했겠지. 그렇다면, 5살과 7살인 두 아이들과 20분 정도는 함께 있어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내 계산이 남편에게 이렇게 화를 불러일으킬 일인지 당황스러웠다.
후에 도착한 K의 와이프 S도 나의 독일어 선생님께 독일어 수업을 배웠다. K가 구매대행 사업한다고 바쁘다며 독일어 한마디를 못하고 내내 재독교포에게 통역비를 내며 지낼 때, S는 살아야 한다며 얘들을 보며, 남편의 가게에 출근하면서, 독어 수업을 듣고, A1, A2를 합격하고는 B1의 독일어 급수 시험까지 준비했다.
남성과 여성은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역차별이 더 큰 문제라고 해대는 세상이다. 여성가족부는 없애고 인구문제를 고민하겠다고 한다.
S는 2018년 겨울,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한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출국했고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 S와 K는 별거에 들어갔고, S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독일에 적응하는 3년의 시간 속에는 S와 S의 두 아이들이 있다. 나와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항상 그들이 있다. 여섯이 대륙 건너 독일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전 어딘가에 산다는 S와 그녀의 두 아이들도 우리를 떠올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기를 예뻐하던 S는 독일에서 잘 지냈더라면 셋째도 낳았을 것이다. S는 언니가 둘, 남동생이 하나 있는 다복한 4남매의 셋째 딸이라, S도 아이가 많았으면 했다. S의 두 아이들이 결혼할 마음을 먹을는지 또는 자식을 낳을 생각을 하려나? 두 아이들도 S도 보고 싶은 마음이 더럭 든다. 독일에서 둘의 부부싸움은 정도가 극심해서, 그들은 한 공간에 함께 하기엔 생채기가 많은 지경에 이르러 함께 하지 못했다. 둘의 싸움에서 양립하던 화두는 육아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과 무너져가는 구매대행업에서 오는 가장의 무게였다.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험만 놓고 세상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추락하는 출산율을 보면 평등 또는 조화라는 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지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로서는 평등할지언정, 엄마로서는 불공평한 삶을 살고 있기에 아이를 낳지 하지 않으려는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하고 있으니 출산율은 뭔 짓거리를 해도 오르지 않는 모양새다.
여가부는 없애도 인구문제는 다루겠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 호박씨로서는 문장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이해가 안 간다. 여성과 가족, 젠더 문제는 쏙 빼고 인구를 늘리겠다면, 어디 아기 공장이라도 짓겠다는 소리인가 싶다. 그 얘들은 국가가 키울 것인지도 궁금하다. 소는 누가 키운다지?
서울에 올려 보낸 금쪽같은 아들에게 거처를 제공한 이에게 어머니는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이것이 한국의 어머니다. 2022를 사는 나 또한 어머니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앞선 세대의 어머니들처럼 자신의 삶을 바쳐서 양육하는 그녀들의 뒤를 보며 자랐고, 길어진 가방끈만큼 남성과 똑같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의 역군이 되어라 주문받았다. 어머니에게도 남편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호박씨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줄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에 와보니 일과 가정의 밸런스를 맞춰가는 복지와 배려가 넘치는 대기업이 되어가면서, 남편은 골프를 열심히 치러간다. 골프를 쳐야 사회생활이 되는 것이라며, 기꺼이 골프 치러 그를 내보내는 것을 지지해줘야 한다고 어머니는 거듭 말씀하신다.
워라벨이란 일과 골프 사이의 밸런스로 그 명칭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 남성 모두 다 골프와 친해지는 그날이 오면, 그때서야 출산율 증진을 위해 여성의 일과 가정을 돌아볼 텐가? 그때 되면 가임 여성은 얼마나 될 것이며, 임신을 하고 싶은 여성은 얼마나 될 것인가?
당장 호박씨부터도 딸아이에게 결혼도 출산도 권하지 않는 오늘인데 말이다. 아이는 낳지 않고 개만 자꾸 키워대는 것은,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돌봄은 쏟아붓고 싶으나, 내 삶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속마음인 것만 같다.
정치를 안 하니, 유명인은 절대 아니니 누구 눈치 안 보고 이렇게 써 내려갈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아, 좋아라! 봄볕처럼 아무 소리나 써 내려가기 좋은 날이다.
대문 그림
펠릭스 발로통, The ball , 1899